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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최근 인천의 각종 경제 지표가 소비, 생산, 고용 등에서 완만하게 좋아지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지표라는 것은 항상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라서 한때의 현상으로 미래를 예측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 인천의 부진, 부채라는 이미지에 익숙해 있던 터라 그 수치가 크든 작든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던 소식이라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실업률은 전국 수치보다 높고 소비자물가는 상대적으로 많이 올랐으며 생산과 판매도 여전히 부진하다 하니, 하루빨리 과거의 영예를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인천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이래 한국 최대의 산업도시였다. 수도권 생필품의 공급처로서 기능했기에, 인천과 그 외곽지역은 새로운 공업지대로 발돋움하면서 크게 주목됐다. 단지,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했고, 소수의 이방인이 대다수의 토지를 점유하는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운집해야만 했다. 인천 거주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과 인간적인 대우문제가 노사 충돌로, 나아가 노동운동과 항일민족운동으로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일제가 군국주의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함에 따라, 인천 역시 전시병참기지로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다. 만석동의 동일방직은 군복을 생산하는 라인으로 변해갔고, 묘도는 매립돼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와 조선이연금속(현 현대제철) 등이 들어섰다. 급기야 1943년에 이르러서는 잠수함을 제작하라는 명령이 하달됨에 따라 만석포구 도크가 신축돼 4척의 잠수함이 구축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과 동시에 나머지 2척이 포구에 그대로 방치됐으니 저간의 사정을 미뤄 짐작할 수가 있다.

 광복으로 온 나라가 흥분과 축제의 열기에 놓여 있었지만, 오히려 인천의 사정은 녹녹지가 않았다. 인천은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하고 군정(軍政)을 펼친 곳으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해 혼란을 거듭했고 적산(敵産) 등 청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일본의 잔재와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하나 일신돼 갔고,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마련돼 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인천에 또다시 시련을 줬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 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했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궈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휴전 후 20여만 명의 피난민까지 수용했던 인천지역사회는 각고의 노력을 다시 해야 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중심에 인천이 있었고, 인천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뤄졌다. 임해 공업단지가 건설되고,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과 그에 따른 연안부두의 축조, 경인고속도로 건설, 경인전철의 부설 등이 바로 그러한 예로,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키는 동인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은 인천을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실현시키려는 국가의 핵심 전략이었으며, 외국인 투자가의 기업 활동과 경제활동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됐던 국제 사회를 다시 한 번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 지역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인천은 이미 대내적으로 항만과 공항을 배경으로 국토개발과 경제, 산업발전의 축인 서해안 지역의 출발점이자 수도권 대규모 배후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국가의 요충지였다. 거기에 더해 최근 인천은 수인선과 도시철도2호선의 개통 그리고 KTX 신설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110여 년 전 한국 최초의 경인철도로부터 이어져, 이제 새로운 철도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비류백제 미추홀 정착에서 출발한 인천은 2030여 년의 긴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다. 철도와 항만, 공항 등은 타 시도와 차별화 된 역사적 인프라로서 인천의 잠재력은 무한하기만 하다. 인천의 저력이 곧 발휘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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