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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대한민국의 안보 위기가 정점의 위험 수위를 향해 치닫고 있다. 조만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와 6차 핵실험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대한민국의 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번영은 평화를 토대로 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런데 그동안 평화의 달성 방식에 있어서는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간에도 입장의 차이가 있어 왔다. 한쪽에서는 미국을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로 간주하고 남북한의 민족 공조를 통해서 만이 평화 실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북한을 전쟁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보고 북한을 압박해 정상 국가로 끌어내야 비로소 평화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결국 대한민국은 민족 화합이든지 북한 체제의 변화든지 간에 전쟁에 대한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의 평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평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이와 전혀 다르다. 즉 북한은 남한의 완전 적화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건설된 상태를 평화로 여긴다. 실제로 북한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김일성 집권 때부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집요하게 견지해 왔고 그 수단으로 삼은 것이 핵과 미사일이다. 만일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지하는 대가로 미국과 수교를 단행한다면 이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결국 남한은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북한의 핵 위협과 군사적 도발에 직면할 것이다.

 핵무기가 없는 상태에서의 체제 경쟁에서는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경쟁을 사실상 원점으로 돌려 놓았다. 이제 비상한 각오와 주도적인 외교 전략으로 대응하지 않고는 자칫 남한의 안보는 더욱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될 여지가 크다. 햇볕정책은 과거에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탁월한 결정이자 최선의 길이었다. 하지만 핵 개발을 목적에 둔 북한의 돈을 위한 노림수였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김정일의 배신으로 이 정책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난 2003년 8월 5일자 사설에서 정몽헌 현대 아산 회장의 자살은 남북 정상회담을 유치하는 대가로 북한에 돈을 지불한 남한의 정책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의 일부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이 회담에 합의한 것은 파산상태였기 때문이며 북한 정권이 변화했다거나 변화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해 아직도 기대 섞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 이후로 참여정부, MB정부를 거쳐 지금까지도 이 지적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은 북한도 불신하지만 자신의 안보 사정보다 북한정권의 입장을 더 두둔하는 듯한 일부 한국 정치권의 행태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겨누고 있다. 남한식 평화의 적은 북한의 위협 못지 않게 남한 내부의 이념적 갈등에도 있다. 김정은을 감히 호찌민에 빗댈 수는 없지만 독일식 통일이 아닌 베트남식 통일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차례나 버림받은 바 있다. 그 결과가 한 차례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이어졌고 또 한 번은 한국전쟁을 촉발시켰다. 특히 구한말에 미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겠다고 결연하게 나선 일본을 택하고 무기력했던 조선과 친미적인 고종 황제를 포기했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전격적이고 모욕적으로 버림받은 실례에서 보듯이 한국이 똘똘 뭉쳐 스스로 적을 막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비장한 결의를 보이지 않는 한 미국은 언제든지 한국으로부터 돌아설 나라이다. 한국은 단독으로 인권과 경제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핵과 미사일과 화학무기로 무장한 북한과 맞서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국가였던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참패하고 아테네의 민주정은 스파르타식 과두정으로 바뀌면서 영화롭던 그리스반도 전체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민주국가가 병영국가에 패했던 기원전 5세기의 악몽이 그저 악몽이기를 바라기에는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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