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한가운데 큰 나무 하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난 14일 가을바람을 따라 청학동 큰 나무를 만났다.

 성인 3∼4명이 둘러싸야 손이 닿을 만큼 웅장한 이 나무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대해진다. 이 거목(巨木)은 고개를 위아래로 젖혀도 한눈에 모두 담기지 않았다. 청학동 큰 나무는 둘레 6.3m, 높이 15.3m, 추정 나이 500여 살의 느티나무다. 문학산 옆 연경산의 줄기 따라 뿌리를 내린 이곳의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크고 작은 일들을 지켜봐 온 마을의 큰 어른이다.

 지나는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를 뿌리며 인사를 하고, 동네 꼬마들은 놀이터처럼 뛰논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들은 주변 집들의 담벼락까지 뻗어 하나로 이어준다. 군데군데 뜯겨 나간 껍질과 가지 밑의 옹이는 한 오백년 넘는 세월의 용틀임(용의 모양을 틀어 새긴 장식) 무늬를 띄고 있다. 우람함과 거대함으로 첫인상을 심어 준 청학동의 느티나무는 연수구에서 1989년 보호수로 지정해 올해 534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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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림의 미학을 가진 느티나무

느티의 어원은 느티나무가 지닌 신성(紳性)의 어떤 징조라는 뜻의 ‘늣’과 수목의 성상이 위로 솟구친다는 뜻의 ‘티’가 어우려져 생겨난 ‘느틔’라는 것이다.

우리말 늦(늗, 늩, 늣)은 느지에서 유래하고, 느지란 좋은 조짐이나 징조, 즉 상서(祥瑞)를 뜻하는 함경도 방언이다. 음소(音素) ‘늦’만으로도 느티의 유래를 살피기에 충분하다.

느티의 음소 ‘늦’은 우리말 부사 ‘늦게’를 의미하는 옛말 느지와도 이어지고, 느릅나무와도 잇닿아 있다.

# 수많은 생명을 끌어안는 어머니 나무,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살아가는 방식이 느긋하고 늠름하다. 느티나무 아래는 서두를 수 없는 느림의 공간이며, 수많은 생명을 끌어안는 어머니 나무다. 느티나무라는 한글은 서거정의 느틔나 정철(鄭澈,1536∼1595)의 느태처럼 15세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그 뿌리 ‘느지’는 신화보다 더 오래된 선사시대 종교적 삶의 시작 단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 느티나무가 들려주는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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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주고 있는 청학동 느티나무.
"느티나무를 보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왔어요. 그 뒤로 이곳에 눌러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청학동 느티나무를 관리하는 청학동 마을공동체 ‘마을과 이웃’의 윤종만(57)회장은 강원도 홍천 출신이다. 그러나 이 느티나무와 함께 산 지 30년이 넘었다. 그는 또 이곳에서 마을공동체를 결성하고 10년 넘게 활동 중이다.

"1991년께 청학동 일대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주민자치대책위원장을 맡았어요. 일부 주민들이 ‘느티나무 때문에 개발이 되지 않는다’며 나무를 베자고 입을 모았어요. 당시 감정평가사나 공무원들을 매일 만나며 설득해 느티나무를 지켜냈죠."

청학동 마을공동체는 마을의 상징인 느티나무 아래서 2009년부터 8번째 ‘느티나무와 함께하는 마을 축제’를 열고 있다.

윤 회장은 "느티나무 아래서 ‘금혼식’ 등 마을 사람들에게 전통혼례와 잔치 등을 열고 있다"며 "느티나무는 항상 우리 마을과 함께하며 축복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인 느티나무는 자신의 기도도 들어주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며 "마을 사람들의 정서적 안정과 안녕을 만들어 준다"고 덧붙였다.

# 신성함과 영험을 지닌 느티나무는 옛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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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학동에서 느티나무를 지켜봐 온 최흥식(81)씨.
청학동은 한국전쟁 이전 최씨 가문(범골, 가운데말, 서쪽말, 방울토, 앙골)과 김씨 가문(무푸레골), 박씨 가문(청릉)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400년 이상 청학동에서 터를 잡고 산 최씨 가문에서 이곳의 느티나무를 관리했다.

경주 최씨 화수공파 33대손으로 2008년까지 느티나무 관리를 맡아 오다 마을공동체(마을과 이웃)에 넘겼다는 최흥식(81)씨는 "연경산은 산신으로, 느티나무는 나무신으로 불렸지…. 손만 대도 단명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연경산과 느티나무에서 산신제를 이어 지냈다고 전했다. 연경산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나무에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는 낮에 더듬으며 길을 걸어야 하는 노인도, 봇짐을 가득 실은 일꾼도 돌부리 하나 걸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최씨 어르신 중에 느티나무에서 뻗은 나무 줄기 하나를 자른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 느티나무는 원래 속이 비어 있었다고 한다. 성인 4∼5명이 들어갈 정도였고,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피신한 마을 주민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 화재 등이 구멍에서 빈번하게 발생해 전쟁 이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나무의 구멍을 메웠다.

그는 "어린 시절 최씨 어르신들이 이 나무는 500년이 훨씬 넘었고 영험한 존재니 함부로 손대지 말라 했다"며 "올해 534년보다 더 많이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온갖 풍파를 겪고도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어린 시절 마을 아이들에게 더없는 식량 창고이자 놀이터였다고 한다.

"느티나무 기둥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많았는데, 봄에 ‘콩새’가 와서 낳은 콩새 알로 끼니 걱정은 없었죠." 느티나무 바로 앞집에서 태어나 아직도 느티나무와 함께 산다는 김성원(56)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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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학동 느티나무를 관리하는 마을공동체 ‘마을과 이웃’ 윤종만(57)회장.
김 씨는 집 앞마당까지 내려온 느티나무 큰 가지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았고, 나무 기둥 구멍에서 나오는 새알을 삶아 먹으며 배를 불렸다고 한다. 이웃 동네에선 이 느티나무 껍질을 벗겨 가 약으로 달여 먹었다고 한다.

그는 "어른들 말로 60년 전에 천둥·번개로 불이 난 적이 있고, 그때 제일 커다란 나뭇가지도 잃었다"며 "더 오래전에는 마을에 홍수가 나 사람이고 가축이고 다 떠내려가 죽을 판에 느티나무를 잡고 산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느티나무의 정기를 받아 나도 3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아낌없이 주는 느티나무에게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감사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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