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家爭鳴 (백가쟁명)/ 百 일백 백/ 家 집 가/ 爭 다툴 쟁/ 鳴 울 명

제나라 수도 임치성에는 성문이 13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서문의 하나인 직문(稷門)은 천하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를 기탄 없이 토론하는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요람지였다. 위나라가 강하게 된 원인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한 데 있었음을 안 위왕은 직문 부근에 호화저택을 짓고 인재를 모아들여 학문 토론의 광장으로 삼았다. 직문에는 여러 가지 사상과 학술을 연구한 학자들이 여러 나라로부터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백가쟁명’이라 불렀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다투어 자신의 학문 사상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학문 사상을 논평하는 것이다. 제의 위왕이나 선왕(宣王)은 직문에 관한 한 이러한 자유 분위기를 절대 보장하고 적극적으로 백가쟁명을 장려했다. 직문의 백가쟁명기는 중국의 학문·사상의 황금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鹿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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