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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고대 역사를 되새기다 보면 우선적으로 자료의 부족을 실감하게 된다. 2000년대 들어 그동안 백제 건국 신화에서 가끔 그 이름이 언급되는 것에 그쳤던 ‘소서노(召西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2005년 충북 음성에 있는 조각공원이 ‘소서노 영정’을 그려낸데 이어 9개월 만에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소서노는 난세에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고구려와 백제 건립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선덕여왕 등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여성들과 구분된다"는 설명이었다.

2006년 5월부터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2007년까지 방영됐는데, 극중의 소서노가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의 캐릭터가 각종 뮤지컬,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방면의 콘텐츠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소서노에 대한 역사적 실상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영역 속에서 탄생한 모든 상상력은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되기에 이르렀다.

미추홀은 인천이고 이곳에 터를 잡은 시조는 비류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비류백제라 한다.

「삼국사기」제23권 백제본기(百濟本紀) 제1 ‘백제 건국 설화’에는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류와 온조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는데……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河南, 위례)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바다’냐 ‘평야’냐의 선택에서 바다를 선택하는 비류의 의지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며, 그가 당시 왜 바다를 택했을까 하는 의문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이다. 그로부터 2030여 년이 지난 지금 인천은 해양도시의 대표적 공간으로 바다와 함께할 운명이라는 것을 비류왕조가 미리 예언한 것은 아닐까?

이와는 달리 이 책의 별단에 "일설에는, 시조는 비류왕이다……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래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어머니(소서노)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면서, 백제의 시조를 비류라 하였다.

여기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31)에서는 "소서노가 뇌물을 바치고 서북 백리지 미추홀과 하북 위례성 등을 얻어 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백제라 하더라……소서노가 재위 13년에 돌아가시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의 유일한 여제왕의 창업자일 뿐더러 곧 고구려와 백제의 양국을 건설한 자이다"라 하여 소서노를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여제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대 인천과 관련한 비류와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아무튼 최소한 장자 비류의 주도하에 동생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가 미추홀과 한강 유역으로 남하한 것은 사실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드러난 몇 줄의 기록으로 인천을 홍보하는 스토리텔링의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지명만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는 ‘억지’보다, 동상을 만들어 논란을 야기하는 것보다, 과연 비류와 소서노가 지금의 인천에 어떤 의미를 주는 존재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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