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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이 있다. 일상 속 어느 평범한 한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순간. 따로 여행가방을 챙기거나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 어디로든 가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오던 남자 그레고리우스에게 비 오는 어느 평범한 하루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뜻하지 않게 덜컹거리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야 하는 의외의 시간이 펼쳐진다.

 그는 몇 해 전 오래 살아온 아내와 이혼한 채 홀로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다. 그의 이혼 사유는 지루한, 재미없는 남자라는 게 당시 아내의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는 재미없는 사내였다. 매일을 시곗바늘처럼 살아가는 그레고리우스는 교사직과 고전문헌 연구에 깊은 애정을 가졌지만 성향 자체가 뜨거운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사람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출근길 아침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 그레고리우스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시야에 붉은 코트를 입은 한 여인이 들어왔다. 교량의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강물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위험에서 여인을 구하고, 이후 그녀는 입고 있던 코트와 책 한 권 그리고 15분 후 출발하는 리스본행 기차표를 남긴 채 사라진다. 서둘러 찾아간 기차역에서 여인을 찾아 모든 것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녀는 없었다. 어리둥절한 그 순간, 리스본행 기차는 서서히 플랫폼을 떠나고 있었고 그레고리우스는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예기치 않은 순간 우연히 겪게 되는 한 남성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그를 인도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리스본으로 향하며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읽어 내려간다. 책에 매료된 남성은 저자의 인생을 따라가며 1970년대 격동의 포르투갈 혁명시기와 마주한다. 그 속에서 당시를 살았던 네 명의 젊은 남녀의 꿈, 이상, 혁명, 사랑, 질투 등의 격정적 감정을 그레고리우스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자기 안에 내재돼 있던 삶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에게 열정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 준 리스본을 뒤로하고 일상인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이에 그와 여정을 함께한 마리아나가 묻는다. "그냥 여기 머무르면 안 돼요?" 그리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 속 그레고리우스가 남을지 다시 떠날지는 열린 결말로 남겨 둔 채. 그러나 그가 끝내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의 삶은 건조했던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의 불씨를 지폈으니. 지금 우리의 경험이 삶의 극히 일부만을 체험할 뿐이라 느낀다면 떠나도 좋으리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완의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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