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한 통의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날아 왔다. 사진 속에는 내가 있었다. 이날 오전, 경기도미술관이 주관하는 ‘생생화화(生生化化) 2016’-‘산책자의 시선’전 현장투어에 있었던 ‘나’를 누군가가 찍은 것이다. 그리고 문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늘 전시투어 중에 작품 일부처럼 앉아 계시길래 찍어 보내드립니다."

 몰래 찍혔지만 문자 내용 덕인지 기분은 좋았다. ‘고맙다’는 내용의 답장을 전달했고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어, 그런데….’

 의도했는지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진 속 구도가 도미술관의 ‘산책자의 시선’과 딱 맞아 떨어졌다. 작가 김지섭의 설치 작품 사이로 다른 작품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산책자의 시선’이었다.

 시선(視線)…. 기존에 서해안을 통해 썼던 ‘관점’은 주체의 상황이 기준이 되지만 시선은 객체의 가치를 따라 달리한다. 물론, 이 가치에는 다시금 주체가 투영되지만 결국 시선은 ‘끌리는’데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다른 사람(주체)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객체가 돼 봤을까. 아니, 이러한 생각을 갖고 행위를 실천해 본 적은 있는가. 물론 20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좋든 싫든 그런 일을 해 왔지만 이는 직업일 뿐 의식을 지니고 노력을 해 본 기억은 아쉽게도 많지 않다.

 남자 본능으로 이성의 시선을 끄는 것이나 직업적으로 성공의 시선을 끄는 것이나 사회적 인간으로서 시선을 끄는 것이나 어느 하나 마뜩잖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100세 시대에 아직 절반도 살지 않은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는 게 어디인가.

 연말이다. 들뜬 분위기 속에 저마다의 시선은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시선이 하나 있다. 많은, 대다수 국민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다. 진실이라는 시선, 나는 또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길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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