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리노의 브라에서는 할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발비아노 와이너리’가 있다.
이탈리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의 인근 나라들과 달리 유독 먹거리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의 작은 가게만큼이나 협소한 카페도 가족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터줏대감이 된 식당이나 카페, 식재료업체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사용하는 식재료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정확히 알고, 공정한 거래를 통해 가져온 재료로 손님에게 건강한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슬로푸드 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30년 전 로마의 유서 깊은 스페인광장에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가 생기자 ‘슬로푸드’ 운동이 시작됐다. ‘맛있고(지역의 특성에 맞고)’, ‘건강하고(생산 과정이 깨끗하고)’, ‘공정하고(생산자에게 공평한 대가가 주어지고)’를 강조하는 슬로푸드 운동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이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 흔한 스타벅스가 이탈리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음식에 대한 그들의 문화는 이제 지역을 넘어 글로컬 브랜드로 나아가고 있다.

# 슬로푸드의 발상지 브라

브라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인구 3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전 세계 160여 개국에 10만 명의 회원과 1천500여 개의 지부를 둔 국제슬로푸드운동본부가 위치해 있다.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이자 국제슬로푸드협회 회장인 카를로 페트리니가 브라 출신이다.

▲ 파스타 재료를 생산 유통하는 업체인 ‘파스티피치오’에서는 20여 명의 직원이 90여 종의 파스타 재료를 생산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에서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가 문을 열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인들이 이를 반대하기 위해 시작한 먹거리 운동이다.

브라에서 만난 파올로 디 크로체(Paolo Di Croce·46)국제슬로푸드협회 사무총장은 "슬로푸드 운동은 음식이 맛있고, 깨끗하고, 공정하게 거래되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맛있다’란 개념은 단순히 미각뿐 아니라 각 나라가 지닌,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간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맛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 세계인이 똑같은 햄버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각 지역의 문화를 담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깨끗하다’는 뜻은 소비자가 음식을 섭취할 때 식재료가 어디에서 생산됐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산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기보다 내 고장에서, 나의 주변에서 생산되는 안심 먹거리를 이용할 때 깨끗한(건강한) 음식이 된다는 얘기다. 로컬푸드의 90% 이상이 슬로푸드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는 설명이다.

끝으로 유통과 판매 과정에서 생산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공정한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올로 사무총장은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이런 내용들을 교육하고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한국에서는 김치나 비빔밥, 사찰음식 등이 대표적인 슬로푸드 사례"라고 말했다.

▲ 이탈리아 미식과학대학 내부
슬로푸드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슬로푸드 운동의 핵심 중 하나로 학생들의 교육에 중점을 둔다. 브라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위치한 교외 마을 폴랜조에는 페트리니가 슬로푸드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미식과학대학(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s)이 있다. 이곳에는 음식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세계 각국의 학생들과 요리전문가들이 다니고 있다.

학생들은 미식과학대에서 음식의 ‘조리법’보다 음식 ‘자체’에 대해 공부한다. 학교를 졸업해 ‘셰프’가 되는 것이 아닌 ‘음식전문가’가 된다는 설명이다. 학생들은 음식의 가치와 철학을 탐구한다.

대학 홍보 담당인 파올로 페라리니는 "우리는 학생들에게 음식을 잘 만드는 방법보다는 식탁에 오르기까지 어떻게 생산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등 음식문화를 알려 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아이들이 음식을 360도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식과학대의 목표"라고 말한다.

2004년 대학 설립 이후 현재까지 약 2천 명의 유학생이 미식과학대를 다녀갔으며, 한국 학생도 20여 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식과학대는 세계 유명 셰프들을 초청해 이들이 학생들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고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는 우리나라 선재스님이 연잎밥 등 사찰음식에 대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 3대를 이어온 파스타 유통업체

이탈리아 토리노에 위치한 파스타 유통업체 ‘파스티피치오 볼로그네즈(PASTIFICIO BOLOGNESE)’는 3대째 토리노 전통 파스타를 만들어 이탈리아 전 지역에 판매하고 있다.

▲ 옛 여왕이 살던 빌라 내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인 빌라 델라 레지나(villa dela regina)가 숙성되고 있다.
이 회사는 1949년 할아버지가 창업한 후 아버지를 거쳐 현재는 손녀인 크리스티나 무차렐리(50)대표와 여동생이 함께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회사에는 아직도 아버지가 나오고 있으며, 두 명의 사위들도 함께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20여 명의 직원들과 기계화된 공장에서 95개 종류의 파스타를 생산하고 있다. 하루 생산량은 1천200㎏, 연매출은 150억 원 규모다.

특징은 이탈리아 각 주에서 생산되는 밀가루나 치즈 등 대표 식재료를 직접 공급받아 파스타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밀가루 반죽을 비롯해 고기 가공, 반죽을 다양한 모양으로 찍어내는 작업, 숙성, 포장까지 모두가 이 공장에서 이뤄진다.

크리스티나 무차렐리 대표는 "오랜 전통과 슬로푸드 철학을 바탕으로 신선한 지역 재료를 사용해 건강한 파스타를 만들어 온 원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로컬 브랜드를 지켜온 것이 이탈리아 전 지역과 다른 나라까지도 파스타를 납품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청년 손자가 대 잇는 발비아노 와이너리

토리노시 외곽 시골 마을에는 전통 기술과 현대 시설을 접목해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농가형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가 있다.

1941년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발비아노(Balbiano) 와이너리는 현재 손자인 루카 발비아노(34)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 이탈리아 파스타 유통업체 대표인 크리스티나 무차렐리와 가족.
루카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부인과 고향으로 돌아온 귀농인이다. 그는 토리노에서만 만들 수 있는 ‘프레이자(FREISA:포도의 한 품종으로 1900년대 제일 유명했던 포도 이름)’ 와인시리즈를 비롯해 ‘비그나 빌라 델라 레지나(VIGNA VILLA DELLA REGINA:레지나 여왕 이름을 딴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발비아노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시내에 위치한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들어져 품질과 당도가 매우 좋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한 매년 4천 병만 한정 생산되는 레지나 여왕의 포도주는 판매처를 직접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루카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 시내에 포도밭을 보유한 와이너리 3곳과 협약을 맺고 네트워크를 구축해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

루카 발비아노는 "법학을 전공했고, 아버지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했지만 고향에서 직접 생산한 와인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아 결국 집으로 오게 됐다"며 "직접 수확하고 숙성시켜 탄생한 포도주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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