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jpg
▲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매년 이맘때 한 해를 돌이켜 지난 일들을 정리해 보면 항상 어렵고 힘든 일들만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올해만큼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일들이 많이 일어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여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즉 브렉시트에 이어 미 대선에서의 트럼프의 당선 그리고 국내에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이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탄핵소추 결의까지 그야말로 난세(亂世)다. 우리나라는 지난 60년대 이후 대외개방과 수출지향 경제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유지해와 타 개도국이 부러워하는 경제로 발전한 나라다.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 모두 그간의 대외 개방과 세계화보다는 자국 우선주의나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는 소위 신고립주의 또는 신민족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향후 우리의 경제가 나아갈 기본 방향과 전략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커다란 변화인 것이다.

이런 대외적 환경의 격변기에 국내에서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 리더십의 공백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전략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이고 미중 간 및 일중 간 패권 경쟁은 동북아에 신냉전시대로의 회귀를 알리고 있다. 이미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한국 사회에 대충격의 쓰나미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형국이다. 고래로 난세라고 하면 전쟁이나 혁명 등 무력이나 폭력에 의한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는 사태를 말한다. 하지만 21세기의 난세는 조금은 다른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중동이나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지구촌 곳곳이 전쟁 중이지만 지난 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강대국 간에 전면적 전쟁은 없었다. 대리전이나 국지전 아니면 냉전(冷戰)은 있어왔지만 대규모 살상과 전면적 작전 수행이 수반되는 소위 본격적인 열전(熱戰)은 없었다. 아마 핵이나 대량살상무기가 주요 군사력이 되면서 전쟁 발발 시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공멸한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인구가 밀집해 있고 주요 강대국이 인접해 있는 동북아에서는 그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국지적 도발은 계속돼 왔지만 지속된 긴장감에 비해 본격적인 군사 대결은 없었다. 이는 어쩌면 이 지역의 군사 안보적 위기가 모두가 진정으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가짜 위기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어려운 형세가 당장 무력을 수반하지 않은 점에서 전통적인 난세가 아닐 수 있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그 해결을 더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난제들은 대부분 무력이나 폭력을 통해 해결돼 왔다. 이러한 해결책은 단기적으로 인명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희생이나 비용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21세기 난세는 그에 비해 전쟁이나 혁명을 통해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훨씬 성숙하고 균형 잡힌 즉 극단을 배제하는 중용(中庸)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국내 문제를 보더라도 대통령 탄핵소추를 이끌어낸 일반 국민의 촛불 민심은 가히 혁명적인 힘을 보여줬다. 하지만 촛불 시위가 민중혁명으로 발전되지 않는 한 촛불시위가 완전히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촛불시위로 나타난 민심을 그간의 적폐를 해결하고 낡은 질서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만드는 어려운 과제는 결국 우리나라를 책임지는 사회 지도층의 몫이다. 질서를 지키고 폭력을 철저히 배제하는 촛불시위에 대한 외국의 반응은 국민은 현명하고 도덕적인데 사회 엘리트는 부패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 국민 수준보다 지도층 수준이 문제라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이익을 쫓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하고 의로움을 쫓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엘리트나 지식인이 군자는 아니다. 군자는 돈이나 학식, 지위하고는 상관이 없다. 처신의 기준을 자기 이익보다는 공의(公義)에 두는 사람은 그가 비록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지위가 낮더라고 군자이다. 반면 요즈음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는 많은 일그러진 엘리트처럼 아무리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고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나라와 사회가 어떻게 되더라고 개의치 않는 인간들은 모두 소인이다. 다사다난한 올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난세를 헤쳐 나가는 중용의 지혜를 가진 군자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꿈을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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