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홍 갯벌문학회장.jpg
▲ 한기홍 갯벌문학회장

정유년 새해가 곧 밝아온다. 장닭의 힘찬 ‘꼬끼오’ 외침에 세상의 모든 어둠과 침체, 우울, 질곡이 걷혀지는 느낌이다. 그렇다. 올해 무거웠던 시대의 너울들은 힘차게 걷어버리고, 새해는 장닭의 늠름한 기상과 부지런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장닭의 새벽을 깨우는 꼬끼오 외침이야말로 ‘톨레랑스 정신의 상징’이라고 생각해본다. 백가쟁명의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모두가 잠들었다가, 숙면으로 청정해진 상태의 뇌리에 파고드는 삶의 호출소리가 바로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꼬끼오 소리는 어제의 치열했던 논쟁과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사유들을 다시 복기해보고, 반성과 깨우침의 동기를 새롭게 부여해주는 페어플레이 호각소리와 같다. 새벽의 텅 비고 순수해진 뇌리에 휴머니즘의 향기를 불어넣어주는 천상의 음률인 것이다.

 톨레랑스(프랑스어, 영어식 표현은 Tolerance)는 관용을 말한다. 나와는 또 다른 타인의 견해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면, 그 견해의 차이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정치·종교·도덕·사상·학문·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비평과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으로도 쓰인다.

 필자가 문단 데뷔 초기에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본다. 당시 창작열에 불타는 동인들끼리 자주 모여 이른바 ‘합평회’를 가졌다. 합평회(合評會)는 각자의 창작품을 돌려가며 읽고는 서로 비평(批評)하면서 문학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는 자리다. 창작의 신열에 든 동인들이 태반이어서 왕왕 열띤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그런데 날카롭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어디든지 있게 마련이다.

 ‘안면몰수’하고 타인의 작품에 첨삭을 가하고 장황하게 교훈조로 문예사조(文藝思潮)를 들먹이는가 하면, 급기야는 ‘수준이하’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습작’으로 치부해버려 상대방의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사례가 있었다. 그러면 수준이하로 내몰린 동인의 모습은 다음 모임에서 볼 수 없었다. 그 후 ‘몰아붙인 자’와 ‘당한 자’는 문단에서 견원지간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시 필자는 탄식하면서 톨레랑스의 교훈을 되새기곤 했다. 문단이라고 관용의 미덕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날선 비판과 냉혹한 지적은 변화와 혁신의 도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평 속에서도 녹아내리는 너그러운 관용의 온기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취적인 휴머니티의 구현일 것이다.

 아련하지만 가슴을 적시는 한 장면의 기억도 떠오른다. 인천 도원동은 고교시절부터 살아온 고향 같은 곳이다. 약관시절 달동네로 불린 이곳에 ‘오성이’라는 왜소한 청년이 있었다. 동네친구들과 골목의 구멍가게 앞에서 막걸리 잔을 놓고 어울릴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보곤 했다. 약간의 지체부자유와 언어도 어눌한 지적장애를 가진 그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친구는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에 의하면 천애 고아라고 하며 어느 노부부의 집에서 겨우 밥술이나 건사하며 지내는데, 필자와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귀띔도 있었다. 수년 후 필자가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돼 경기도 군포시에 근무할 때 그가 찾아왔다. 그의 온전치 못한 지적역량과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수소문해 나를 찾았는지는 모른다. 너무나 반가워 근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사주고 군포역 개찰구까지 배웅하는데, 그가 불쑥 무언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가만히 보니 천 원짜리 두 장을 꼬깃꼬깃 접은 거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사양치 말아달라는 갈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려다가 흔쾌히 주머니에 넣으며 활짝 웃었다. 그의 곤궁한 처지를 떠올리기보다는, 지난날 작은 온정으로나마 그를 이해해 주었던 필자에 대한 그의 격려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결국 그와 필자는 톨레랑스의 진의를 주고받은 셈이 아니었을까.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