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을 캔다. 늘어나는 굴 포대만큼 세월이 흘렀다. 5살과 3살짜리 새끼들 손을 잡고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 들어와 38년 동안 굴과 세월을 캤다. 그이는 젊으나 늙으나 항상 바쁘다고 투덜거렸다. 젊어서는 일감이 많아 거짓말을 조금 보태 하루 종일 굴을 캤다. 지금은 예전보다 양이 줄었는데도 바쁘다. 하루에 두세 번씩 자식 집에 가서 손주도 봐야 하고, 집에 있는 일흔일곱의 할아버지도 챙겨야 한다. 세상 엄마들은 다 고생한다고 말한다.
예전보다는 많이 깨끗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1960~70년대 지은 낡은 집들이 남아 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엔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골목 위엔 어느 집에서 사용하는지도 모를 전선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지붕에 올린 부서진 슬레이트도 삶의 시간이다. 골목 벽에는 연탄과 굴을 까고 껍질을 모아 둔 포대도 보인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조봉희 씨는 올해 예순다섯이 됐다. 이 동네서는 나름 젊은 축에 속한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거동이 불편해 굴을 내려놓은 아주머니들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목욕탕 의자에 앉아 굴을 딴다. 벌이가 줄어도, 칼질하는 오른손의 주먹이 쥐어지지 않아도, 삭신이 쑤셔도 굴을 딴다. 인이 박혀서 그런 거란다. 싫으나 좋으나 수십 년 동안 힘쓰는 일만 했으니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전보다 값이 많이 줄어 이제는 한 포대에 1만 원, 8천~9천 원밖에 받지 못해도 여전히 목욕탕 의자에 앉는다.
"지금은 신사야. 뻘도 다 씻어서 주잖아. 예전에는 수도료 나온다고 굴 껍데기를 씻지도 않았어. 칼 들어가는 눈 찾기도 어려웠지. 춥기는 얼마나 추웠는지. 전에는 이것(실내 공동작업장)도 없었어. 다 골목에서 깠어. 추석 끝나고부터 3~4월까지 굴이 나오는데, 한겨울에도 사람들이 밖에 쭉 앉아서 깐 거야. 손이 얼마나 시럽던지. 고무장갑이나 많았나. 입은 얼고. 영하 10℃에도 밖에서 굴을 깠던 거야."
그리고 만석부두에 도착하면 ‘구루마(손수레)’를 끌고 이곳 괭이부리마을까지 왔다. 지금과 같은 도로 포장은 언감생심이었다. 굴곡진 언덕을 오르기도 쉽지 않았다. 뻘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굴은 인생을 더욱 무겁게 했다. 그래도 ‘젊어서’ 했다고 말한다.
새해 조 씨의 가장 큰 바람은 ‘터전’이었다. 지금까지 몇십 년을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서 살았는데 어디 가서 정을 붙이겠느냐고. 나갈 수도, 나갈 돈도 없단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몸을 겨우 눕힐 만한 방과 몸을 돌리기도 버거운 부엌 하나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다. 조 씨의 올해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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