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도깨비’다. 반평생을 내버려진 혼혈아의 대부로 살아온 서재송(88·세례명 비오)옹을 만났을 때 든 느낌이다. 검은 베레모 밑으로 길게 뻗은 하얀 눈썹과 하회탈 같은 환한 표정에 아이처럼 맑은 눈망울이 빛난다.
서 옹은 중학생인 어린 손녀가 매주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간다며 찬성이든 반대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으니 세상 참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했다.
큰딸 옥선(59)씨와 함께 자유공원을 찾은 서 옹은 "바람이 차다"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산책 대신 인근 전통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에서도 서 옹은 따뜻한 오미자차 대신 커피를 고집해 옥선 씨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제는 큰딸아이 말을 잘 들어야지. 마누라보다 간섭이 더 심해. 하지만 평생 못난 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라준 것이 너무 고맙지."
서 옹에게는 옥선 씨 외에도 2천 명이 넘는 자식이 있다. 옥선 씨 역시 위로 두 명의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 두 명이 있지만 그동안 아버지가 해외 입양을 보낸 이들도 친형제처럼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송현동(성가정의 집)에서 버려진 혼혈아를 맡아 돌볼 때 제 나이 20살이 갓 넘었는데 주위에서 미혼모 취급까지 받았는 걸요. 하지만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어요."
옥선 씨는 "어릴 적 부평 캠프마켓 주변에는 많은 혼혈아들이 방황하고 있었다"며 "아버지는 이들을 돌봐 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으로 입양 보내는 일을 하셨다"고 전했다. 그들에게 옥선 씨는 큰누나이고, 이모이고, 엄마이기도 했다.
"미국에선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고 이민을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 번도 국민이 먼저 나라를 버린 적이 없다." 서 옹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보며 ‘이게 나라냐’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지 않느냐"며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가엽게라도 여길 텐데…"하고 혀를 찼다.
서 옹은 가난했던 시절 혼혈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 보낼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고 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아이를 미국 양부모의 손에 쥐어 보낼 때 몇 번이고 돌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망울을 잊지 못 해서다.
서 옹은 얼마 전부터 입양 보낸 아이들이 고국 한국에 한 번쯤 올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그 중에는 형편이 돼도 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자신을 버린 나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제 한국에도 많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과 국적, 그리고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였으면 한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새해는 ‘금 나와라 뚝딱’하며 착한 서민들의 바람을 들어주던 도깨비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생각이다. 가난했던 시절 버려진 혼혈아들을 수호신처럼 돌보던 서 옹과 같은 도깨비 말이다.
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