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도깨비’다. 반평생을 내버려진 혼혈아의 대부로 살아온 서재송(88·세례명 비오)옹을 만났을 때 든 느낌이다. 검은 베레모 밑으로 길게 뻗은 하얀 눈썹과 하회탈 같은 환한 표정에 아이처럼 맑은 눈망울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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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옹을 만난 건 지난해 12월 초순 서울 광화문 거리에 수백만 개의 촛불이 켜지고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처리됐을 때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의 상징인 맥아더동상 곁에는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고, 그 곁에 노인 몇 분이 차가운 벤치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그가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TV를 통해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을 자주 봤지. 자식들 만류로 그곳에 가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가슴이 뛰는 걸 보면 (이 나라가)아직은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 옹은 중학생인 어린 손녀가 매주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간다며 찬성이든 반대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으니 세상 참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했다.

큰딸 옥선(59)씨와 함께 자유공원을 찾은 서 옹은 "바람이 차다"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산책 대신 인근 전통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에서도 서 옹은 따뜻한 오미자차 대신 커피를 고집해 옥선 씨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제는 큰딸아이 말을 잘 들어야지. 마누라보다 간섭이 더 심해. 하지만 평생 못난 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라준 것이 너무 고맙지."

서 옹에게는 옥선 씨 외에도 2천 명이 넘는 자식이 있다. 옥선 씨 역시 위로 두 명의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 두 명이 있지만 그동안 아버지가 해외 입양을 보낸 이들도 친형제처럼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송현동(성가정의 집)에서 버려진 혼혈아를 맡아 돌볼 때 제 나이 20살이 갓 넘었는데 주위에서 미혼모 취급까지 받았는 걸요. 하지만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어요."

옥선 씨는 "어릴 적 부평 캠프마켓 주변에는 많은 혼혈아들이 방황하고 있었다"며 "아버지는 이들을 돌봐 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으로 입양 보내는 일을 하셨다"고 전했다. 그들에게 옥선 씨는 큰누나이고, 이모이고, 엄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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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옹진군 덕적도가 고향인 서 옹은 일제 치하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중학생이 돼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입됐다. 또 자유당 시절 4·19를 겪었고, 유신시절 군부에 의해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인천에 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선다고 할 때 주민대표로서 전면에서 데모도 해 봤다. 역대 11명의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했고, 올해 또다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데 한 표를 던질 것이다.

"미국에선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고 이민을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 번도 국민이 먼저 나라를 버린 적이 없다." 서 옹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보며 ‘이게 나라냐’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지 않느냐"며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가엽게라도 여길 텐데…"하고 혀를 찼다.

서 옹은 가난했던 시절 혼혈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 보낼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고 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아이를 미국 양부모의 손에 쥐어 보낼 때 몇 번이고 돌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망울을 잊지 못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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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라가 됐으면 해. 아직도 해외 입양 보낸 아이들 중에는 자신을 버린 이 나라를 원망하며 살고 있는 애들이 있잖아. 그 애들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지."

서 옹은 얼마 전부터 입양 보낸 아이들이 고국 한국에 한 번쯤 올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그 중에는 형편이 돼도 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자신을 버린 나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제 한국에도 많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과 국적, 그리고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였으면 한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새해는 ‘금 나와라 뚝딱’하며 착한 서민들의 바람을 들어주던 도깨비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생각이다. 가난했던 시절 버려진 혼혈아들을 수호신처럼 돌보던 서 옹과 같은 도깨비 말이다.

 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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