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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단군의 유향(遺香)이 강화도 곳곳에 전하고 이들의 사회·문화적 유산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확장돼 기원전 1세기경 ‘비류백제’를 건설케 하는 기반을 이뤘다. 인천의 지리적인 조건은 수도(首都)와 인접한 바닷가에 위치해 대한민국을 반석에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이민족의 침입에도 최전선에 서야만 했다.

 인천이 호국의 도시로 부각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백령도, 대청도에 진(鎭)을 설치해 해상 방비 업무를 담당했고, 몽골의 침입을 당해서는 강화에 임시수도를 세워 강도(江都)정부를 이끌었다. 삼별초의 항쟁에서 보듯, 그들은 본거지를 강화에서 진도로 옮겨 가는 와중에도 영흥도를 비롯한 서해도서에서 대몽항쟁의 기치를 올렸으며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왜구가 서해로 북상해 개경 근처의 강화도와 인천 해안의 섬들을 공략할 때도 수도의 안위를 위해 희생을 감내했다.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해금(海禁)정책을 기조로 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은 전국을 전란으로 휩싸이게 했고 인천, 부평지역 역시 한때 적의 수중에 놓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묘와 병자년의 호란 때에는 강화도가 왕족의 피난처가 됐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급기야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후 북벌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화도 초지진으로 가는 길목인 월미도에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수 있는 행궁(行宮)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는 조선의 운명을 담보하는 보장지처(保藏之處)가 됐던 것이다.

 18세기 대륙의 청나라가 강성해짐에 따라 오히려 동북아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중국과 일본이 개방되고, 조선이 개화와 척사(斥邪)라는 갈등 국면에 접어들 무렵 조선의 개항을 강제하는 제국주의 세력이 몰려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는 그들의 함대가 강화해협을 지나 서강(西江)까지 도달함에도 속수무책이었으나, 양헌수의 책략에 말려들어 60∼7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리품만 챙겨 물러가고 말았다.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강화도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킨 후 점거했고, 수륙 양면 포격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350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전사자를 냈다.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요호는 해로를 탐측하면서 초지진으로 침입한 후 제물포 대안의 영종진에 보복공격을 단행했는데 조선군 전사자 35명을 냈다. 인천이 개항되기 바로 전 인천에 화도진, 부평에 연희진을 설치해서 외세의 접근을 불허했던 이유는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인천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등 이방인들만의 전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광복 후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은 사상 유례없는 희생을 치렀다. 9·15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아무리 빛난다 해도 전쟁의 상흔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은 연평해전이 보여 주듯 아직도 서해5도에서는 진행 중에 있다.

 2017년 벽두 인천시가 호국 보훈의 기치를 올렸다. 국가수호를 위해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이 됐던 인천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보훈가족에 대한 선양사업과 국가수호 관련 유·무형의 자원을 발굴·활용, 인천가치 재창조를 통해 인천의 새로운 도시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해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인천은 여타의 도시들이 일상적으로 겪었던 경험과는 달리 너무나 크고 아픈 역사적 사건과 함께했다. 이제 인천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고, 인천의 희생을 담보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대내외에 알려야 한다. 나아가 우리 인천의 아픔이 대한민국 발전의 기틀이 됐음을 모두가 공유하게 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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