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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계봉 시인

집을 나설 때부터 추적추적 날리기 시작한 눈발을 보면서 오늘 하루도 예사롭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문화예술회관 근처를 지날 때쯤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지만 나는 점심만 먹게 되리라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선배는 최근 뭔가 만만찮은 결심을 하게 된 것 같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선배 스스로 그 ‘모종의 결심’에 대해 이야기를 해올 터였다. 아무리 우리가 눈과 술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평일 점심 때 업무를 팽개쳐두고 낮술을 마실 형편은 아니라는 걸 선배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곱창전골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반주로 나온 소주를 세 잔째 들이켠 후, 선배는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실상 들어갈 때부터 나는 그 직장의 성격이나 근무 조건이 선배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운 선배는 앞뒤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잘 했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안다. 그가 단지 일이 힘들기 때문에 그만 둘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선배는 육체적 고됨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 모멸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가끔은 참기 힘든 정신적 모멸조차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그 선배의 영혼이 너무도 맑았다. 명민한 활동가이자 시인인 그 선배가 휘황한 자본의 거리에서 그간 얼마나 치명적으로 상처를 입어왔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함부로’ 그의 결심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무척이나 빛나던 많은 지인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의 숱한 공격 앞에서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왔는가를 너무도 자주 봐왔다.

지난한 학습을 통해 확보한 지식들이 현실에서는 그리 소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자본이 자본을 증식하는 물신의 현실에서 순수한 영혼들은 어쩔 수 없이 루저(Loser)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담스럽게 눈발이 흩날리는 날, 선배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생활의 전선에서 패퇴한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괜스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언제라야 이 질긴 생활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당당할 수 있을 것인지. 자본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숱한 싸움을 전개하며 살아오던 사람들이 어떻게 쉽사리 그 자본의 유혹에 쉽사리 포섭될 수 있겠는가? 고작 "힘내요"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 없었던 나는 애꿎은 소주만 축낼 뿐이었다.

누가 삶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누가 신념의 붉은 빛을 고귀하다고 했던가. 이래저래 가슴이 아려오는 하루였다. 나는 선배와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와 ‘낯익은’ 취기를 다스리며 그에게 장문을 문자를 띄워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종류의 ‘정서적 보시(普施)’밖에 없다는 것을 쓸쓸하게 확인하면서.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상처를 견디며 숨어 사는 건지요. 휘황한 자본의 공격 앞에서 너무도 무력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심장을 지닌 채, 하루하루 이 천박한 세상으로부터의 모멸을 온 몸으로 견디며 아파하는 숨은 천사들 말입니다. 도대체 환금성이란 결코 없는 시 따위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맑은 시심을 훈장처럼 여기며 고통과 모멸을 견디고 있단 말인지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응원합니다. 그 모든 숨은 천사들을. 그들이 목숨처럼 지닌 순수한 열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시선들이 결국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워진 세상에서 그들의 상처 또한 회복될 수 있을 테니까요. 힘내요. 숨은 천사들. 비루한 일상과 고단한 삶의 공격으로부터 부디 살아남아 주세요. 꼭, 꼭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 만한 곳 아니던가?’라는 말,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 창 밖으로 펼쳐지는 무채색 물감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제가 분명히 당신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에게도 여전히 두렵고, 매번 낯선 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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