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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아직은 밤이 긴 겨울, 요즘같이 잠 못 이루는 밤에 그래도 한번 읽을 만한 책으로 하남(霞南) 김성한(金聲翰 1919∼2010)의 「거인들의 시대」를 추천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근현대 인물들의 역사적 활동과 비화를 당시 현실 여건 설명에 곁들여 담담한 필치로 적은 에세이집이다. 시기적으로는 풍운의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 광복 직후 질풍노도의 시대를 거쳐 이승만 시대와 1970년대를 아우른다. 하남은 소설가로서 1950년대 손창섭(孫昌涉), 장용학(張龍鶴) 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총아였다. 등단에 즈음해 월간지 「사상계」 주간에 취임하고 이어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주간, 편집인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하남이 자신의 글 속 인물들을 굳이 ‘거인’이라고 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일생 공과(功過)를 논외로 한다면, 모두 이 나라 각계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읽는 이에 따라서는 ‘어떻게 이런 인물들을 거인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남은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큰 인물, 지인(至仁)에 대해서도, 또 훼절이나 실조(失操)한 인사에 대해서도 새삼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사상, 이념의 차이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다. 그저 고른 어조로 솔직하게 거인 시대의 종말을 안타까워하며 이 땅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 선생에 대해 하남은 단지 한 면목만을 적고 있다. 도산 선생이 종로경찰서에서 갖은 고초를 겪을 때의 이야기다. 선생을 취조하는 왜경의 사무실이 밤새워 분주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선생께서 "우리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본 사람들의 저런 정신을 배워야 하는데…." 했다는 부분이다. 그렇게도 참담한 상처를 입힌 원수 같은 상대를 평상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선생의 지인 면목! 길게 더 무엇을 쓰랴. 자신의 집 지붕 기와를 벗겨 오산학교 지붕에 올린 기미독립운동 33인의 한 분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일화. 그래서 선생의 집 지붕은 오래도록 반은 기와, 반은 짚을 이은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취중에 심한 무례를 범한 현진건(玄鎭健)을 친히 집에까지 찾아가 무탈한 대화로써 다시 끌어안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동아일보 사장의 가슴 넓은 금도. 김구(金九) 선생 휘하 우익 청년들한테 정문에서부터 큰 모욕을 당하고도 장준하(張俊河)에게 자기 수첩을 찢어 주소를 적어 주면서 "그동안 이역에서 고생이 많았소. 우리 언제 한번 식사라도 같이하세. 우리 집은 깍두기가 일품이오" 했다는 여운형(呂運亨)의 인간미.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에 이어 차례로 비명에 간 김구, 장덕수(張德秀), 조만식(曺晩植) 선생 등.

 최남선(崔南善), 홍명희(洪命熹)와 더불어 한말의 삼재사(三才士)로 칭송 받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그는 우리 근대문학의 개척자이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고 말았다. 춘원이 지조를 지켜 대통령에 나왔다면 김구, 이승만(李承晩), 여운형 누구도 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와 일본인들조차도 춘원에 대해 ‘화장(化粧)이 짙은 사람’이라며 못 믿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춘원이 부인 허영숙(許英肅) 여사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는 인간의 또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한다. 권총을 들이대는 친일파 권세가 박춘금(朴春琴)을 때려눕힌 조선 팔도 최고의 갑부 최창학(崔昌學)의 이야기에는 기개가 솟는다. 낭비를 싫어하고 공짜를 바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최창학은 구두쇠로 소문이 나서 그가 죽었을 때는 조문객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품 속에서 어려운 친척과 친지, 그리고 자기가 관계하던 단체 명의로 예금을 해둔 통장이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가는 삽시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밖에도 이야기는 진진하다. 그만큼 거인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지금은 어떤가. "상하가 송사를 즐기고, 싸움질에 능하고, 식언, 궤변, 음모, 불법, 억지가 공공연히 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흩어져 원심 분리 작용을 일으키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하남의 한탄대로 소인천하(小人天下)다. 어쩌면 좋은가. 곧 있어 우리는 거인을 만나야 하는데. 분열과 반목의 이 사회를 화합과 이해로 이끌 거인은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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