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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분명하게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인식과 가치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과 사고방식이 확산되면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와 그 개념이 도전받고 있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기엔, 그와 대립되는 다양한 이야기와 상황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건 분명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는 있으나 소외되는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분열을 낳는다. 이와 같은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으로의 변화는 영화 속 캐릭터 형성에서도 전환을 불러왔다. 기존 영화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립이라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었다면, 최근엔 선악의 모습을 한몸에 담고 있는 입체적인 등장인물을 더욱 자주 볼 수 있다. 여기 이런 입체성을 보다 빨리 구축한 영화를 오늘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 ‘피가 마른다’는 1960년에 개봉한 일본 감독의 작품으로, 양가적 감정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과 스피디한 전개로 전후 일본 사회의 병폐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초조한 몸짓의 기구치는 창백한 얼굴로 양복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찬물로 세수를 한 그는 이내 결심한 듯 건물 밖으로 나선다.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회사 임원인 듯 보이는 한 사내가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진 퇴사를 권고하고 있다.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대량 해고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싸늘한 분위기를 깨며 기구치는 연단에 선다. 더듬거리는 말로 회사는 대량 해고를 중지해야 한다고 말하며 권총을 이마에 대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 충격적인 뉴스는 빠르게 전 일본에 퍼지며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되고, 기구치는 다행히도 미미한 경상만을 입은 채 건강을 회복한다.

인기인을 가만둘 리 없는 자본사회는 그를 광고모델로 캐스팅하면서 한 남자의 삶을 바꿔 놓는다. 야심만만한 광고기획자 노나카는 그를 생명보험사의 모델로 채용하고, 그녀의 예상대로 회사의 실적은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순식간에 지면광고뿐 아니라 TV광고 스타로도 발돋움한 기구치는 대중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 해고 앞에서 죽음까지 생각해야 했던 미약했던 존재가 이제는 스스로의 영향력을 과신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느새 스타로 자리잡은 기구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 광고기획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이에 배신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기획자는 저열한 방법으로 그를 추락시킨다. 하지만 기구치는 명성을 회복할 방법으로 또다시 권총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보여 주기 식의 쇼 형태로 시도한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나약한 인간과 자본주의, 매스미디어와 대중의 저열한 속성 등을 날카롭게 포착한 영화 ‘피가 마른다’는 1960년, 32세의 젊은 감독이었던 요시다 기주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세련된 연출력과 속도감 있는 전개, 군더더기 없는 빠른 편집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펼쳐낸다. 이 작품은 당시 기존 상업영화들이 감동적인 휴머니즘에 기대어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는 달리, 개인과 사회의 문제 어느 한쪽으로도 감정적인 치우침 없이 포착해 작품을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사유하고 스스로 가치판단을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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