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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평생교육원장
감리서는 개항장 최고의 공공기관이었다. 최근에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세관도 감리서의 관할하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지방행정 관청이 담당했던 업무는 물론 외국과의 통상, 비자발급, 조계지관할, 치안유지와 행형, 외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일어나는 각종 쟁송 등 감리서가 담당한 업무는 실로 방대했다. 매립지의 측량업무와 불용물품 매각도 감리서의 업무에 속했을 정도다.

 감리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제도와 외국문물의 충돌과 타협이 이뤄지던 곳이다.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인 감리서는 개항 이후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단행한 행정제도 개혁이 건축적 형태로 구현된 장소로 근대적 의미의 공공청사가 건립됐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감리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던 인천감리서는 인천개항에 맞춰 1883년 9월 19일에 개설됐지만, 처음부터 독립된 청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도진사에서 1년 정도 머물다가 건물을 새로 지어 1884년 8월에 내동(內洞)으로 옮겼다.

 ‘감리서’라는 이름도 나중에 생긴 것으로 최초의 명칭은 ‘감리 인천항통상사무(監理 仁川港通商事務)’이다. 감리서는 감리가 일하는 공서(公署)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항기 조선정부가 생산한 각종 문서에 ‘감리서’라는 말은 찾기 어렵다. 이는 개항 후 50년이 지난 뒤 간행된 ‘인천부사’에도 감리가 일하는 청사를 ‘감리서’로 불렀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감리서신장정(監理署新章程)’이 1885년 12월 23일에 각 개항장에 전달될 무렵에 이르러서야 정식기구로서의 감리서가 등장한다.

 인천감리서가 입지한 내동지역은 인천 개항장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요지였다. 신중하게 터를 고르던 조상들의 지혜가 서린 내동 일대가 외곽지역으로 남게 된 것은 일제가 항구와 항구인근에 세워진 일본조계지를 중심으로 인천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인천감리서 터의 중요성은 이곳이 1930년대 인천부청을 새로 지을 때 신청사 건립 후보지로 거론되다가 예산 문제로 무산됐던 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인천감리서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우체사인 인천우체사는 물론 법원과 검찰, 학교도 세워졌다. 감리서 안에 있었던 경성감옥 인천분감은 백범 김구 선생이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인천감리서는 부산과 원산에 비해 개항이 늦었음에도 새로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운 최초의 감리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근대인천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인천감리서 부지는 개설 이후 134년이 지나는 세월 속에서 대지는 여러 개의 필지로 나눠졌고, 유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대지 전체의 모습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이마저도 도시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인천시는 인천항 1·8부두에 조계지 세트장과 가상현실 체험장을 세우는 개항장세트장 건립을 추진할 예정이라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된 계획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안에 담길 콘텐츠와 역사적 근거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근대 개항기 인천을 관할하던 인천감리서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것은 감리서의 기능을 이어받은 일제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이 남긴 기록 곳곳에서 ‘인천감리서 관원은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업무를 처리하지 않는 눈엣가시였을 인천감리서 관원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인천의 모습은 일본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 많다. 침략자의 입장에서 작성한 문헌과 사진에 담긴 근대 인천은 참다운 인천의 모습이 아니다. 근대 인천을 재현하는 데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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