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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왕조국가에서 권력은 왕에게서 시작되고 왕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순환구조로 작용했다. 따라서 국왕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지 못하거나, 독선적인 권력 독주를 견제하지 못하면 왕권 자체도 부패의 늪에 빠졌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대부분 권력형 비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뇌물 수수와 내란죄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천205억 원을 부과받았다. 노태우 대통령도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 원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에 추징금 2천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은 개인적 신분으로 집권당 공천과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한보그룹으로부터 뇌물 수수로 구속된 바 있고 대통령 자신은 이 문제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제거하기 위해 부패방지법과 돈 세탁방지법을 만들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 세 명이 모두 사법처리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임기 말 불거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형을 비롯해 부인과 아들, 조카사위 등 가족이 연루된 바 있다. 게다가 대통령 일가뿐 아니라 대통령의 386 측근들 또한 박연차 회장의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거나 구속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 집권 기간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구속됐다. 게다가 이번에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됐다. 사(私)적 이익을 위한 공(公)권의 남용으로 빚어지는 부패의 덫을 박근혜 대통령 역시 비켜가지 못했다. 헌법재판소 재판부는 대통령이 최순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했다는 점을 대통령의 파면 사유로 들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단 한 명의 성공한 대통령도 두지 못하는 나라가 됐다. 역사적인 비극이고 국가적인 슬픔이며 국민적인 아픔이다. 하지만 한국은 대통령조차도 법으로 그만두게 할 수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 모두와 전세계가 직접 목격하게 됐다. 탄핵 결정의 결과는 촛불의 승리가 아니라 헌법과 법치와 국민의 승리이며 태극기의 패배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력과 결탁한 비리와 부정과 부패의 패배이다. 태극기가 건전한 보수를 대표할 수 없듯이 촛불이 사이비 진보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 반대 주장과 자유민주주의 수호 의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촛불과 태극기가 함께 최후까지 지켜내야 할 대한민국의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를 이간질시키면 당장은 선거에 유리할지 모르지만 그런 행태로는 어떤 후보도 절대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으며 그런 지도자를 국민은 바라지도 않는다. 설령 대통령이 되더라도 또다시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선동과 편가르기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자의 도덕성과 통찰력을 비롯해 안보관과 자기판단 능력 보유 여부를 조목조목 검증해야 한다. 그래야 실현 가능한 정책과 비전을 토대로 통합과 격차 해소, 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부정부패보다 불공정이 더 심각한 국가이다. 불공정의 근절만이 부정부패를 막고 기득권을 견제하며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는 최선의 방안이며 신뢰를 토대로 예측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첩경이다. 예컨대 불공정에 심각하게 감염돼 있는 한국 경제는 세대교체에 급속도로 실패하고 있는 중이다. 포천지의 글로벌 500대 기업 명단에 한국 기업은 여전히 똑같은 얼굴들뿐이다. 대기업의 기술 빼내기, 핵심 인력 가로채기, 납품 단가 후려치기 등의 횡포를 막아야 벤처기업도 살고 중소기업도 살릴 수 있다. 혈연과 지연으로 발생하는 각종 특혜와 불법을 막고 학연과 학벌로 조장되는 반칙과 야합을 제거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새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이다. 개화기 선각자 유길준은 한 국가의 국력은 국왕의 능력이나 현명함 여부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지력(智力) 수준에 달렸다고 피력했다. 「서유견문」이 나온 지 15년 만에 조선은 망했다. 이번 19대 대통령의 수준도 국민들의 지력에 의지한 채 선거 열차는 5월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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