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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학 푸른꿈비전스쿨 교장
소서노(召西奴 BC 66~6)는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며 극찬했다.

 「삼국사기」는 소서노가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의 딸로서 고주몽과 혼인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설에는 소서노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혼인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며 비류와 온조의 탄생에 대한 다른 설도 전하고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태가 죽은 뒤 소서노가 한동안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는 것과, 부여를 탈출해 엄리대수를 건너온 주몽과 재혼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주몽을 도와 연타발의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나라를 새롭게 고구려로 재탄생시켰다는 점과 그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도 고구려 건국과정에 함께 했다는 것이다.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은 압록강 중류와 비류수 일대의 강줄기를 장악하고 중계무역으로 기반을 잡고 있었다. 그는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새로운 땅을 찾아온 고주몽과 그 일행을 품는다. 그리고는 과부로 지내고 있던 자신의 딸 소서노와 결혼시켜 사위를 삼는다. 백발백중 명사수이자, 비범한 고주몽을 사위로 삼으면 나라를 방어하고,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주몽에게는 동부여를 도망 나올 때 함께했던 무리들과 함께 연타발에게 충성했고, 왕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아, 연타발의 왕위 계승자로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소서노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고주몽은 졸본부여에 정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왕위 계승은 물론 고구려 건국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서노는 연타발이 가진 넓은 영토와 재물과 사람들을 아낌없이 고주몽의 왕위계승과 고구려 건국에 사용했다. 소서노는 고주몽을 반대하는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을 무마시키고, 하나가 되도록 이끌었다. 비류와 온조도 어머니 소서노를 도와 고구려가 창업되도록 했으며, 고주몽의 왕권 강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고주몽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영역을 넓히고, 주변의 위험 요소를 제거해 나가며 나라와 안정시키고 왕권을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예씨(禮氏)의 소생 유리가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됨에 따라, 비류와 온조는 왕위계승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유리의 왕위계승은 고구려계가 토착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본격적인 정적 제거의 신호탄이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서노는 아들들과 함께 남하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는 분열했다. 비류는 해양왕국을 지향하며 미추홀에 도읍했고, 온조는 한강을 끼고 넓은 평야를 이용한 새 나라를 꿈꿨다. 하지만 형 비류의 미추홀국이 실패하면서 온조의 백제 건국 과정에 용해된다. 이러한 비적대적 통합 과정에 소서노가 있었다. 소서노는 온조의 백제 건국과 자리매김을 돕고, 온조왕 13년(서기전 6)에 61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과정에서 형성된 분열을 해결하고, 평화적으로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졸본부여 세력과 고주몽의 세력이 가진 이질성을 녹여내 고구려를 세우게 한 것이나, 비류의 미추홀국과 온조의 십제라는 두 나라를 통합해 백제로 재탄생시킨 것이 그것이다.

 소서노가 보여준 것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로 향하게 했던 ‘평화와 통합의 리더십’이었다. 그것은 두 나라를 탄생시킨 ‘위대한 어머니의 리더십’이기도 했다. 헌재의 탄핵 결정과 함께 찾아온 2017년의 새 봄, 이 생명의 계절에 소서노의 리더십이 자꾸 목말라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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