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늘상 그랬던 것 같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 경기를 펼칠 때면 새벽이건 아침이건 알람을 맞춰 일어나 티브이를 켰다. 그러고는 ‘와!’ 하고 환호를 외칠 때도 있었고, ‘에이∼’하며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삼켜야 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후자였다. ‘아쉬운 마음’에 항상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경기를)봐서 그런 것인가’. 만약 경기를 안 봤다면 잠에서 깰 일도 없을테고, 그렇다면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을 갈 일도 없었고, 화장실에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실 일도 없었을 터. 나 혼자의 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리 만무할 테지만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각각의 행위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실타래에 얽혀 나온 결과가 아닐까. 즉, 잠에서 깨지 않았다면 그 새벽에 불을 켤 일도 없고 냉장고 문을 열 일도 없다. 그렇다면 전력을 공급하는 곳에서 일하는 당직자에게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주지 않았을까.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면 변기 물을 내릴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수력을 공급하는 곳에서 일하는 당직자에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나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간여(干與)할 수 있다면 그 간여는 간여를 낳고 낳아 저 멀리 이국땅에서 뛰는 선수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관념(觀念)은 비단 이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여러 일과에서도 반복됐다. 공통적인 분모는 그 결과가 예상치 못했거나, 아니 그보다는 결과에 실망스러울 때 스스로를 자책하는 하나의 편집증과 유사했다. 이를 깨달은 순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결과가 예측될 때에는 그 상황을 피해야 했다. 망상(妄想)에서 벗어나려면 애초 단서를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사고의 깊이와 경험의 양이 충분한 뒤에야 이는 망상이 아님을 알았다. 달라진 건, 분모다. 결과가 실망스럽다고 상황을 피하지는 않는다. 설령 그 결과가 전적으로 ‘내 탓’이라 할 지라도 비겁한 변명을 하느니 소신을 지키는게 낫다. 그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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