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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림 칼럼니스트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그 역사를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할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 위험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역사는 해석하는 자들의 목적을 위해 왜곡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역사로부터 참된 교훈을 찾기가 어려움을 우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및 재인식’ 논란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순환론처럼, 오늘날 한반도가 처한 불안한 긴장은 백여 년 전 구한말에 경험했던 국가위기가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위기는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1880년 불평등하게 체결된 조약을 개선하기 위해,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간의 국제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그 당시 청나라 공사관의 서기관인 황준헌을 찾아 갔다. 그때 황준헌은 ‘내가 보는 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소책자를 김홍집에게 소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조선이 열강의 각축구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중국과는 친하고(親中), 일본과는 결속하며(結日), 미국과는 연계하는(聯美) 세력 균형(均勢)전략으로 러시아를 막고 국부를 일으켜 자강(自彊)을 기해야 함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황준헌은 조선이 처한 상황을 ‘연작처당’(燕雀處堂)으로 비유했다. 즉 ‘오대주의 사람들이 다 조선인의 절박한 재앙을 알고 있는데, 조선인들만 알지 못하니 이는 불난 줄 모르고 재재거리는 처마 끝 제비나 참새의 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연민의 표현이었다.

 그렇다, 그때도 그러했지만 이러한 ‘연작처당’의 부끄러움이 또다시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북한의 핵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 간에 해결해야 할 강 건너 불처럼 인식하며, 국민들은 안보불감증에 빠져 있다. 최근 북핵 처리와 관련해 이해관계 당사자인 우리의 어깨너머로 진행되는 미국과 주변 당사국 간의 일련의 물밑거래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지난날 우리가 자력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불안한 현실을 자초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국제정치는 한마디로 ‘힘의 정치’이며, 자국 이익 추구에 의해 작동된다. 이웃국가가 핵무기로 위협하면 상대는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전쟁을 불사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이다. 흔히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스스로 노예국가가 되겠다는 항복의 다른 표현이다. 그동안 북한은 적화통일의 걸림돌인 미군철수에 이어 휴전협정 폐기 및 평화협정 전환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이러한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고, 이제 미군철수를 유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본토 공격을 위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트럼프란 의외의 복병을 만나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핵동결이 아니라 완전한 핵무기 제거가 아니면 모든 선택 가능한 행동을 감행하겠다는 선언으로, 미국은 대량의 가공할 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배치해 준전시 상태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북한과 직접 협상을 위해 암중모색을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해결 방법이 종래의 틀에 벗어나 한반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지난 3윌 21일자 미국의 포린 폴리시(FP)에는 남북한을 한 국가로 통일시키고 중국으로부터 영향력을 배제시키기 위해 중립국으로 만드는 제안이 게재됐다. 북한에게는 고립과 붕괴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체제 보장을 하는 대신 핵을 제거하는 방법을 택할 것인지를 선택케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미확인 시나리오는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것으로, 북한이 핵을 제거하는 경우 미국이 김정은 체제를 보호해주고 개방과 투자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변화가 화급하게 올지도 모르며 격동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비돼야 할 것은 준비돼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가상해 ‘신조선책략’을 다시 써야 한다.

 며칠 후이면 대선이 다가온다. 트럼프와 우리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같이 갈 수 없다면, 이제 한미관계는 동맹관계에서 서로 철저히 계산하고 거래하는 정상거래관계의 국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매우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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