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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時調詩人
신록의 오월이다. 초목의 이파리마다 싱그러운 촉감들이 자글댄다. 지구 온난화 현상인지 예년보다 더 빨리 온갖 꽃이 피더니 푸름마저 앞서 짙어왔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나달 속에서 새 대통령이 조기에 선출됐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예술이 관련 정책 수립에서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민족이 800여 년 동안 지어온 시조(時調)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에, 이달을 노래한 졸작 시조 한 수를 먼저 선보인다.

연초록을 보노라면 / 빠져들기 십상이라 ∥ 사는 게 뭐 별거냐고 / 마음까지 놓았어라∥ 무담시 / 들떠설랑은 / 그리운 이 그리리라. ―‘오월’ 부분

 시조는 예나 이제나 이름 그대로 그때그때를 글로 지어 읊는 것이다. 본인은 한 세대가 넘도록 시조를 짓거나 보아왔다. 시조의 멋이라면 그냥 감칠맛 나는 율격미(律格美)라고 하겠다. 시조에는 운율이 있다. 운율(韻律)은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리듬을 말한다. 이런 속성을 율격이라면 거기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감정을 율격미라고 할 수 있다. 작년 12월 15일에는 우리나라 현대 시조계의 획기적인 선포가 있었다. ‘시조 명칭과 형식 통일안’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운율’을 "시조는 각 장 3 또는 4음절로 된 소절이 4번 반복되는 리듬이다"라고 돼 있다. 흔히 시조는 3장 6구 12소절로 된 우리 민족의 정형시라고 한다. 여기서 ‘음절’은 글자 수, ‘소절(小節)’은 작은 마디라는 뜻이다. 소절은 종전의 ‘음보’ 대신에 쓰기로 한 말이다. 시조의 3장은 초장·중장·종장을 말한다. 12소절이란 이 3장 속에 3자 내지 4자로 된 글자들의 단위가 12개 들어 있다는 말이다.

 위의 시조 ‘오월’에서 ‘연초록을’, ‘보노라면’ 등이 바로 그 ‘소절’의 하나라 하겠다. 이처럼 시조에서의 우리말은 대개 3자 또는 4자로 돼 있는데 이런 것을 자수율이라 한다. 자수율(字數律)은 시조 운율의 생명이다. 오랫동안 짓다 보면 절로 몸에 배어 그리 써진다. 읊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어깨가 움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조 속에 스며있는 한겨레의 가무혼(歌舞魂)이랄까. 그 밑바닥에는 춤과 노랫가락이 그윽이 흐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이내 카타르시스에 든다. 온통 드맑은 기운이 감돈다. 이것이 바로 시조의 율격미다. 저 유명한 ‘봉선화’의 시조시인, 통영의 초정 김상옥 선생은 1940년대 말부터 시조를 현대시조답게 한 단계 격상시켜 써온 분이다. 타고난 시적 감수성으로 낳은 작품들이 현대시조를 머리로 읽고 생각하는 시로 다시 알렸다.

 오늘날 시조라면 음악으로는 ‘시조창’으로, 문학으로는 ‘시조’로 나누어진다. 그는 이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읽고 느끼는 것으로 새삼 내보인 것이다. 그 어떤 자유시에도 미치지 못할 바 아니다. 초정은 자수율을 잘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자유시와 달리 연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의 정서로 현대시조를 써왔다. 율격미를 살린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 자수율을 너무 지나치게 벗어나 쓴 것을 시조라고 하는 이가 있다. 자유시와 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 대한 국문학자 임선묵 선생의 견해를 본다. 대학 강단에서 오랫동안 시조연구를 하신 분인데, 이미 36년 전에 쓴 그의 역작 「시조시학서설」에서 한 말이다. "용인하기 어려운 혼란과 무질서를 드러냈던 시조, 그렇다면 굳이 시조라는 이름으로 시조를 쓰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는 반문에 답변해야 할 것이다. 형태 실험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관습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계 내에서의 갱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지금 비록 미약한 우리 시조 문단이지만, 본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시조가 현대시의 한 부류라고 하여 자유시의 형태처럼 쓰려고 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유시를 쓰면 된다. 어디까지나 시조는 시조지 자유시가 아니다. 누백 년간 우리 민족의 관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시가가 아닌가. 지금은 세계화 시대, 가장 우리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가 있다. 시조의 율격미는 우리말로 할 때 곁에 잘 다가온다. 우리말이 세계화되는 날, 지금은 음지에 있는 시조지만, 정녕 한류다운 정신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다. 이른바 ‘문화 한류(韓流)’는 값으로 매길 수 없다. 문화예술은 정신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한류다운 한류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예술이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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