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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운 객원논설위원

오래 전 아버지의 월급날에는 가족들이 기다리던 외식하는 날이었다. 지금이야 흔한 외식이지만, 전에는 벼르고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짜장면이면 최고이던 시절, 냉면이나 갈빗집이면 정말 신나고 좋은 날이었다. 외식은 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다리며 맛난 저녁을 차리던 날이 월급날이었다. 금융실명제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이 통장으로 자동이체되면서 월급날 가족들이 외식을 하든가 저녁을 같이하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한 달 동안 가족을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는 날이었는데 금융실명제 이후 사라지고 말았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징검다리 연휴와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날, 근로자의날…. 참 돈 드는 날은 많은데 돈 나오는 날은 월급날뿐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밥 사주고 베푸는 사람에게 알랑방귀 붙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월급날 기다린 것이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가 가져 온 월급봉투는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사는 것이 너무 무미(無味)하고 건조하니 거짓으로라도 아버지를 기다렸다고 하자.

 월급날이면 아버지는 기분에 겨워 동료들과 식사도 하시고 술도 드시면, 가족에게 먹거리를 사오시거나 용돈이라도 주셨던 것 같다. 술 드신 아버지 손에는 좀 많이 받았다 싶은 달에는 센베이(일본 과자)를 사시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노점에서 파는 무언가를 사들고 오시곤 했다. 약주가 과하셔 늦은 날에는 자녀들을 다 깨우고, 일장연설도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호방하게 한 세상을 살아오셨던 분들이 우리의 아버지들이다.

 술 드신 아버지의 비닐 봉지 속에는 사랑을 담고 왔다. 월급날이면 사랑스러운 가족에게 주고 싶어서, 술이 취해도 주고 싶은 것을 까만 비닐 봉지에 꾸역꾸역 담고 왔을 것이다. 월급날은 경리과에서 급여를 받아들고 그냥 곧바로 퇴근할 수가 없었을 시대를 살았다. 직장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술과 저녁을 사고, 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비굴한(?) 삶을 사는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취하면서도 가족에게 전해 줄 월급봉투를 챙기느라 취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아버지들. 회식자리에서 자식에게 사 주지 못했던 것을 사주고, 개를 준다고 챙겨오시던 고기 조각과 먹다 남은 음식들. 그것들이 아버지의 까만 비닐 봉다리(봉지의 사투리)에 담겨져 술 드신 아버지와 집으로 오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금융위기로 갑자기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준비 안 된 노후에 앞날이 노란 것이 아버지들의 삶이었던 것도 같고.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돈이면 최고라는 자본주의 시대를 당당함과 월급날 까만 비닐봉지만 챙기느라고 살아 왔으니.

 어느 날 회사에서 나와야 했고, 월급이 줄었다고 가족에게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계산 때마다 뒤로 숨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닐까. 치이고 힘들어도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말도 못했고, 가슴으로 삭히고, 술 한잔이라도 내가 먼저 계산해야 잘 사는 사람으로 여기며 정년을 맞이하고, 당당했던 우리의 아버지들….

 왜 힘들지 않았을까만, 힘들고 지쳐도 참아 냈던 것은 가족이라는 내 식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기에 넘쳐서, 객기에 넘쳐서, 상사에 짓눌려도 돈(월급)을 들고 까만 비닐 봉지에 사랑을 담아서 가족에게 달여 왔을 것 같다. 그런 아버지들은 지금 명예퇴직이다 계약직이다, 정년이니 촉탁직이니 하면서, 아버지들에게 비수를 날리고 있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만이라도 힘을 실어주는 가족으로 생각하자.

 아버지들은 우리 가족을 위해 살아왔고, 가족에게 짐이 될까봐 아직도 돈을 벌기 위해 가정 밖에서 대리운전 자리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사랑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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