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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계봉 시인
# 에피소드1

스포츠센터에서 운동을 하며 러닝머신 앞에 있는 TV를 통해 칠십이 넘은 아버지가 쉰이 다 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연히 시청하게 됐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는데, 만약 제목이 환기하는 뉘앙스대로라면, 이들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특별하고 쉽게 볼 수 없는 이야기라는 말일 테지만, 사실 부모가 병든 자식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비정하게 자식을 버린 부모가 있다면 그런 부모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야기일 것이고, 만약 자식이 병든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야말로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딱 어울리는 소재가 될 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강퍅하지 않은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대하는 마음의 농도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내가 죽으면, 얘 혼자 살아가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살아가게끔 일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주름 많은 아버지의 얼굴이 마치 하회탈의 미소처럼 푸근해 보였다. "저기 카메라 보고 인사해야지"라고 아버지가 말하자 "안녀하세요. 감사하니다." 어눌한 말투의 아들은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마주해야 할 현실은 아직,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만만하지 않겠지만,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아버지의 손이 있는 한 그들의 피곤한 행복, 혹은 달콤한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비는 아들의 손을 어쩔 수 없이 놓게 될 것이고, 그들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동행이 끝이 나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충분히 익힌 아들 쪽에서 아비의 마른 손을 꼭 잡아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순정한 사랑이 존재하는 한 ‘행복한 결말’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 나는 믿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안쓰러운 아들을 가진 아비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아비를 가진 아들, 그들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나는 빌었다.

# 에피소드2

 지난 주말 목욕탕에서의 일이다. 중년의 사내 하나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 사내가 스스로 방향을 바꾸거나 노인의 팔과 다리를 들어가며 몸 구석구석 비누칠을 할 때 살며시 눈을 감은 노인의 얼굴에선 (웃지는 않았지만) 편안함과 만족함이 배어 나왔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으세요?"라고 연신 말을 건네는 사내에게 노인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아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의 행동을 탕 속에 앉아 지켜보았다.

 사내에게 맡겨진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탄력 없는 몸은 한때 당당한 표정으로 사내를 업어주거나 무동을 태웠던 바로 그 몸이자 얼굴일 것이다. 길을 갈 때면 고사리 같은 사내의 손을 잡아주고, 코를 닦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면서도 포근했던 손, 그리고 넘어진 사내를 일으켜 세워주며 활짝 웃던 화사한 얼굴.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이제는 자전거를 배우던 유년 시절의 사내보다도 훨씬 걸음이 엉성하고 많이 불편해진 노인의 손을 아버지의 나이가 된 아들이 든든하게 잡아주고, 코를 풀어주고, 비누칠을 해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옷소매에 팔을 꿰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부끄러워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인은 사내에게 고맙고, 미덥고, 끝내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드라이로 숱이 없는 머리를 뽀송하게 말려준 후 로션을 손에 덜어 얼굴 골고루 발라주자 노인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사내가 아기였던 시절에도 노인은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을 게 분명하지만 자신이 아기처럼 되어버린 현재에도 노인은 사내를 보며 웃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욕조 속에 정물처럼 앉은 채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치매를 앓던 아버지의 풀린 눈과 나뭇가지처럼 말라있던 몸이 생각난다. 그때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을 닦아줄 때 나는 목욕탕에서 만난 그 사내처럼 기꺼운 마음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회한은 이렇듯 불시에 나를 찾아와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아버지의 깡마른 몸을 다시 닦아줄 수 있다면……. 문득 아버지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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