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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時調人
거리는 온통 장미 세상이다. 아파트 화단마다 담장마다 장미꽃이 눈인사를 한다. 인천 계양산 장미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이 장미꽃축제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세계 최대 장미 생산지인 불가리아의 장미축제며, 저 15세기 영국에서 장미전쟁이 벌어질 만큼 예나 이제나 장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꽃 중의 하나로 거론된다. 고대 그리스의 아프로디테나 혹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할 만큼 귀중한 꽃이다. 요즘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짙붉게 숭어리지어 핀 장미꽃이다. 이에, 졸작 단시조 한 수를 읊어본다.

 < 화려해 뵈는 것은 / 속울음을 참는 조짐 ∥ 철마다 한 번쯤은 / 그 속내를 터뜨려야 ∥ 눈부셔 / 꽃피운 토혈(吐血) / 뜰을 흠뻑 적시지 >―<장미> 전문

 본인의 시조집 「독수리는 큰 나래를 쉬이 펴지 않는다」에 실린 첫째 수다. 얼마 전 새 정권이 들어섰다. 이 시조 작품처럼 해당 정책들을 솔직히 국민에게 알려서 공감을 얻고 감동을 주었으면 한다. 새 문화예술 관계 장관 후보로 저명한 시인인 여당정치인이 지명됐다. 문화계 정책 수장인 만큼 자신의 전공 분야를 넘어 문화계 전반을 균형 있게 살펴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마이너리티가 소외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하다. 오랜 전통의 문화유산인 시조(時調)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전통(傳統)이란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 관습, 행동 따위가 계통을 이뤄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숭고한 전통을 바꾸려 하면 안 되며, 전통이 무너지면 유산(遺産)은 곧 유산(流産)이 되고 만다’고 김흥열 시조시인은 그의 저서 「정형의 매력」에서 말하고 있다. 이른바 시조의 정형성, 즉 정형의 속성에 관한 문제다. ‘정형(定型)’이란 일정한 형식이나 틀을 이른다. 시조에서는 3장 6구 12소절에 자수율을 잘 나타내는 것, 쉽게 말해 글자 수를 잘 지키는 것이 정형이다.

 작년 12월 15일에는 서울에서 한국시조협회(이사장 이석규)에 의한 ‘시조 명칭과 형식 통일안’의 선포가 있었다. 그 통일안의 정형 관련 항목에는 시조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시조의 ‘구성’에서는 초장, 중장, 종장을 3장(章)이라 하고, 각 장별 전구와 후구, 즉 2구씩의 합을 6구(句)라 하며, 각 구별 2소절씩의 합을 12소절(小節)이라고 한다. ‘글자 수’에서는 초장 3, 4, 4, 4. 중장 3, 4, 4, 4. 종장 3, 5, 4, 3. 총 45자를 기본형으로 하고, 총 글자 수는 기본형에 2~3자 가감을 허용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총 글자 수는 적게는 42자에서 많게는 48자까지 허용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종장 첫째 소절 3자는 고정이며, 둘째 소절은 5~7자로 한다. 그전에는 초장과 중장의 글자 수를 3, 4, 3, 4.로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소절 3자가 4자로 바뀐 것은 김흥열 시조시인이 고시조 5천 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글자도 많지만 4글자가 가장 많이 활용됐기 때문이다. 위 본인의 시조 ‘장미’의 경우 각 장별 글자 수가 기본형과 딱 맞아떨어진다. 원래는 중장 넷째 소절이 "터뜨려야만" 5글자로 돼 있었다. 이것도 통일안이 종장 첫째 소절과 둘째 소절을 빼고는 각 소절당 2자~5자까지 허용한다고 돼 있어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 시조는 정형시임에도 그 글자 수가 고정된 형식(fixed form)이 아니다. 고정형의 정형시에는 한시의 율시나 일본의 와카 등이 있다. 그러나 글자 수에 약간의 가감이 있는 우리 시조는 누백 년 동안 지어오면서, 한국어의 특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반영한 결과일 뿐 결코 정형시로서 흠이 될 수 없다.

 약간의 글자 수 가감은 우리 시조의 운치라고 본다. 그러나 지나치게 융통성을 강조해 자유시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형성을 허물어 짓는 이른바 파격 또는 변격시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점이 시조를 자유시의 아류 정도로 보는 관점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시조는 정형시지 자유시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글자 수 고정형 시조를 엄격히 지키는 것을 정격 시조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시조의 정격은 정형성에 있다. 이 정형성은 글자 수가 다소 여유 있는 정형이다. 굳이 정격을 시조 앞에 붙이지 않아도 이미 시조 속에 그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시조는 시조다. 정형성은 시조의 생명이다. 정형 속에 만끽할 수 있는 자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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