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호출이다. 지난달 아내와 미국 여행을 떠났던 선배다. 귀국 기념 저녁식사를 함께 하잔다. 한 달 책을 열 권 이상 읽는 책벌레. 그래서인지 세상 모든 일을 고전이나 현대문학과 연결 지어 말하거나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감성적인 정서를 중시해 ‘로맨티스트 몽상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끼리는 그를 ‘4차원’이라 부른다.

 후배가 운영하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선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국물 맛이 일품인 닭백숙을 게 눈 감추듯 먹고 나니 선배가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나에게는 멋진 볼펜 한 자루와 말보로(Marlboro) 담배 두 보루를 건네더니 대뜸 담배 브랜드 명의 유래를 아느냐고 묻는다. ‘모른다’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다운 설명이 이어진다.

 선배의 설명은 이렇다. Marlboro는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우리말로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사랑을 기억한다’라는 문구로, 이니셜을 따 브랜드 명으로 사용했단다. 가난 때문에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청년이 그녀 앞에서 마지막으로 피웠던 필터 없는 담배 한 개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세계 최초의 필터 담배를 만들었고, 훗날 억만장자가 된 청년이 빈민가에서 외롭게 살던 그녀를 다시 찾아가 청혼했지만 다음 날 싸늘한 시신이 돼 있더라는 슬픈 스토리까지 곁들인다.

 다른 선배의 휴대전화 인터넷 검색 결과로 이 이야기는 허구로 밝혀졌다.

 멋쩍은 웃음을 보이던 선배가 ‘비도 내리는데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제안한다. ‘지구에 가끔씩 비가 내리기 때문에 술을 끊을 수 없다’는 선배. 그는 비가 내리면 영원한 미완성 과제인 첫사랑이 더욱 생각난단다. ‘그녀와 함께 바라보고 있을 비가 좋다’며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나도, 세상사람 누구나 첫사랑의 기억을 갖고 산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더욱 아름답고 아련하다. 지금 이룬 사랑의 습작이었을 첫사랑.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내리는 비를 향해 긴 연기를 내 뿜으며 물었다.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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