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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대학원장

최근 업그레이드된 알파고 2.0은 세계 바둑 랭킹 1위인 커제를 가볍게 제압했다. 알파고를 개발한 데미스 허사비스는 이제 바둑과의 대결을 끝내고 과학, 의학 등 범용 인공지능으로 진화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더 이상 인간과 바둑 대결이 무의미해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기술 혁신은 종전의 혁명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디지털, 바이오, 금융, 교육서비스, 사물인터넷 등으로 발 빠른 광폭행보를 선보일 것이다.

 인류의 행태(行態) 패턴도 시대에 따라 변했다. 인류는 문명 초기 많은 양의 정보를 기억에 의존해야 했지만 문자가 발명되고 나서부터는 기억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빨리 배우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것이 기억력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나오고부터는 정보를 검색하는 일이 배우고, 계산하는 것보다는 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검색을 통해 남이 못 본 것을 연결시키거나, 새로운 것을 상상해 내는 창의적 사고가 시대의 요청이 됐다. 물론 많은 것을 알아야 다양한 검색도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지난주 홍성지역의 ‘홍주인문학강의’에서 권영민 교수(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현재는 버클리대에서 한국문학 강의 중)는 ‘이상(李箱)문학과 새로운 시각의 발견’에서 이상은 동시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사물을 바라봤다고 언급했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는 평지에서 사물을 바라본 모습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까마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모습이며, 그의 시에서 그 이전과는 다르게 숫자와 도형을 사용한 것도 일종의 ‘창의적 사고’라고 언급했다.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청년(이상)이 그 시대 서구의 어느 누구와도 견줘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다르게 생각하기’(스티브 잡스의 말), ‘삐딱하게 바라보기’(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름)의 정신을 추구했지만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낮설게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 일찍 그의 시에서 구현했던 셈이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부해진 자신의 삶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며 끝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타인을 사랑하고 인정하라는 의미였다. 인문주의라는 ‘휴머니즘(humanism)’은 인간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의미다. 이것의 라틴어 어원, 휴마니타스는 인간됨을 뜻한다. 라틴어로 된 책을 읽고 쓸 줄 알아야 사람 노릇할 수 있었음을 휴마니타스는 함의하고 있다. 어원적으로 따져볼 때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동양에서도 공자, 맹자를 공부하는 것이 인문학을 의미했다. 동·서양의 고전이라는 인문학들도 특수한 문화와 시대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역사를 통해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고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듬쑥한 고전을 읽고 또 읽어서, 깊고, 다양한 생각들을 가슴깊이 새겨 넣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의미일 것이다. 이전과,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과거와 타자를 공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전통을 아는 일이 진부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동력(動力)이다.

 그런데 요즘, 길거리에 무늬만 인문학인 강연들이 넘쳐나고 있다. 인문학을 가벼운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하는 ‘아까징끼’ 정도로, 아픈 가슴을 잠시 다독거려 주는 ‘힐링’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여기저기 관공서마다 일회성 인문학 강연 플래카드들이 거리마다 나부낀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인문학 강연도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본래 인문학이란 동서양의 고전급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남과 토론하는 것이다. 남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부재(不在)하는 사회는 이쪽저쪽으로 쉽게 휩쓸리는 냄비현상이 나타난다.

 유행하는 거리의 인문학 강연들은 시장원리에 맡겨두고, 요즘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인문학 독서 소모임을 지자체들이 많이 지원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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