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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벌써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때는 아니지만 스케이트 이야기로 잠시 이마의 땀을 씻기 바란다. 우리나라에 스케이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마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에 의해서가 아닌가 싶다. 비숍 여사는 1894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방한해 11개월 동안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 바로 당시의 기행 기록인데 여기에 스케이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두 번째로 배알했던 때에도 일본의 기세가 한결 등등해질 무렵이라 왕과 왕비는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친절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는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 파티를 열어 모든 외국인 집단을 초대했었다"는 내용으로, 이때가 1895년 1월께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간 「신편한국사」에는 "스케이트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보인 것은 1890년대 후반 미국의 알렌(Allen) 공사 부부에 의해서였다. 경복궁 학원청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한 피로연에서 선보인 것이다"라고 돼 있다. 같은 궁궐 행사를 두고 시기나 장소 명칭에서 비숍 여사의 기록과 다소 상이하다. 알렌은 1894년 8월에 우리나라에 입국했는데, 그때 스케이트를 갖고 왔었던 것 같다.

 문제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스케이트를 탄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동아일보에는 1904년, 인천 거주 현동순(玄東淳)으로 나와 있다. 1929년 1월 1일자 ‘스케이트 元祖 氷上의 夜話 - 25년 전 이야기’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그만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25년 전의 일이다. 이때에는 스케이트가 무엇인지 얼음지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을사년(乙巳年)이다. 그 당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찔레트 씨의 가구를 경매할 때에 거저 준대도 무엇 하는 것인지 몰라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철속(鐵屬)의 물건이 있으니 하도 기이하게 여겨 지금 인천 있는 현동순 씨가 일금 십오 전에 이것을 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물건을 사기는 샀으나 현동순도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라 결국 다시 질레트(Gillet) 선교사를 찾아가서야 그것이 얼음을 지치는 스케이트임을 알게 된다. 그는 서울 삼청동 개천에서 스케이트를 타보았던 모양이다. "몇 번 지쳐 보았으나 나아가지를 않아 고심한 끝에 필경에는 그 성공을 하였다"고 한다. 이어 동아일보는 "이것이 조선에 스케이트를 신에 대고 얼음지쳤다는 것의 시초"였음을 증언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기록마다 연도에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아무튼 당시 스케이트는 "스피드용이 아니라 피겨용과 비슷한, 날이 짤막하고 두꺼운 것으로 보통의 구두창 밑에 나사못으로 조여 고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경복궁 향원정에서의 스케이트 파티’라는 말에서 그것이 피겨스케이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스케이트를 신에 대고’라는 동아일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질레트의 스케이트로 인해 현동순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터가 된 것이다. 그는 또 야구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선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이었던 현동순은 질레트로부터 야구를 배워 1905년 허성, 김연호 등과 팀을 만들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야구 시합을 했고, 이것이 또 한국 야구의 효시로 기록되는 것이다. 그는 황성기독교청년군의 투수였으며 후일 야구 심판으로도 활약했다.

 동명이인인지 모르나 현동순은 연극 활동도 한 것 같다. 1930년 극작가 윤백남(尹白南)이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청년회 회원들이 자신의 희곡 ‘국경선(國境線)’을 기독청년회관 홀에서 공연할 때 등장인물로서 가장 열의가 높았던 사람이 구자옥(具滋玉)과 현동순"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동순에 대한 인천 쪽 기록은 1935년 용동에 설립된 인천흥업주식회사에 관련한 것뿐이다. 여기에 당시 인천의 대표 인물들인 최승우(崔承宇), 장광순(張光淳), 박창원(朴昌遠), 최병두(崔炳斗), 이흥선(李興善) 등과 함께 중역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시사(市史)나 체육사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몰년, 출신지, 여타 인천에서의 활동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이제라도 이 흥미롭고 활달하고 능동적이었던 선구자의 행적을 밝혀 그 모습을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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