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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사람이나 동물이 몸이나 그 일부를 느리게 자꾸 움직이다, 게으르고 굼뜨게 행동하다. 꾸물거리다의 사전적 해석이다. 마음도 단정하지 못해서 빈둥빈둥 보내다, 결정을 못하여 시간을 허비하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해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빨리 빨리가 대세인 시대 흐름에 꾸물거림은 지탄의 대상이다. 속도전에 지친 사람들 중에서 느림을 예찬하며 느림의 미학을 주장하기도 한다. 잠깐 쉼의 시간으로 호응을 하지만 결론은 늘 성과를 좇아야 해서 희망사항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간단히 개인의 몫이라고 했지만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자율권을 주지 않는다. 사회 구조상, 가족이나 집단의 구성원 역할에 충실해야 아름답다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기대하는 개인의 몫을 속전속결로 완수해야 하는 의무는 권리로까지 추앙받는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적도에서는 시속 1천667㎞,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북반구에서는 시속 1천337㎞의 속도로 돌고 있다. 외계인이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면 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생명은 제 정신일리가 없다고 걱정할 것 같다. 막상 북극점과 남극점에서의 회전 속도가 0㎞에 가까워 태풍의눈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지구는 고요한데 그 고요를 깨뜨리는 생명은 지구상에 사람뿐이다.

 달팽이는 달팽이의 속도로, 나무늘보는 나무늘보의 속도로, 치타는 치타의 속도로 산다. 사람들만 고유의 속도에 자꾸 가속을 해서 속도위반을 한다. 우리는 고효율을 내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다 보니 늘 조급증에 시달린다. 가속도에 휘둘리다 보면 부작용 발생은 예견된 일이다. 휴식과 여유를 낼 틈이 없어져 나도 주변도 돌볼 시간이 없다.

 영원한 우주의 시간 안에서 순간을 사는 인간인지라 조급함이 당연할 것도 같지만 총량의 법칙이 있어서 우주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꾸물거림도 분명 매력 있다. 태양계 먼 행성인 해왕성의 공전주기는 6만일이나 되어 지구 시간으로 164년을 초과한다. 해왕성의 1년은 우리 평균 생의 2배는 거뜬한 시간이다. 우리의 시간 개념과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 길다고 좋은지 짧다고 안타까운지는 해석의 차이인 것 같다.

 견주어 길어도 짧아도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총량으로 하루를 주고 평생을 준다. 꾸물거림의 대표주자인 나를 변명할 거리로 인용한 수치다. 시간은 과거를 향해 가지 않는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시간을 적절하게 잘 활용해서 현재를 풍족하게 만들었다는 자화자찬보다는 쓸데없이 허비한 것 같아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담보한 현재를 희생하며 최선을 다해 근검하지 않았다는 자책은 늘 현재의 몫이다. 현재도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과의 비교는 내 삶에 덫이 되어 나를 힘들게 한다. 좀 느려도 덜 움켜잡아도 내가 나에게 덫을 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에 한 표를 주고 싶다.

 6월 초에 내 생일이 있었다. 생일 밥을 열 번은 먹은 것 같다. 탄생을 축하해 주고 축복하는 일은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인맥을 부지런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생일만은 예외다. 밥도 먹고 건배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고 립서비스도 거절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대를 사는 것으로 인연이 된 것이고 빨리 지나쳤으면 못 봤을 그대들을 꾸물거리며 살아온 덕분에 마음 찬찬히 볼 수 있었고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꾸물거림증이 답답이나 게으름이 아닌 양질의 호르몬 작용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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