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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회 회원, 삼산고등학교 교사
강화도는 한반도 서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한강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요충지다. 국난 극복의 성지로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문화유산이 도처에 산재한 섬이다. 수도권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늘 관심 지역으로, 미래의 가치가 더 중요시되는 지역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여행 삼아 다녀왔을 경험과 추억을 간직한 익숙한 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강화도는 왜 그토록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섬이었을까? 강화도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강화도가 섬이 된 것은 약 1만8천 년 전부터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면서 해수면이 상승했는데, 현재의 해수면을 유지한 것은 약 6천 년 전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저지대가 침수되면서 지금의 섬이 됐다.

‘강화(江:물 강, 華:빛날 화)’의 유래와 의미는 무엇일까? ‘강화’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 등장했다. 이전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렸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임진강·예성강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 고을’이라고 해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른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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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니산 참성단.
자연과 역사문화유산을 품어낸 강화도의 지형과 암석 그리고 갯벌과 바다. 강화도가 굵직한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지 및 갯벌, 바다의 풍부한 식량자원이 육지의 인간을 강화도로 불러들였고, 역사적 유산은 당시 강화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적 산물이자 걸작품이었던 것이다.

강화도의 전체적인 지형은 섬의 남단에 있는 마니산(469m)을 비롯해 진강산(441m)과 고려산(436m), 혈구산(466m), 별립산(400m), 봉천산(291m) 등 여러 산이 있다. 이 산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강화도를 구성하는 암석은 대체로 선캄브리아대에 퇴적된 암석이 변해서 생긴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들 암석을 원재료로 고인돌, 석탑, 국방문화재 등 돌을 이용한 다양한 석조 문화재를 만들었다. 곳곳에는 낮고 평평한 충적지가 발달해 있으며, 이곳에 대부분의 주택과 경작지가 자리하고 있다.

▲ 강화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동막해수욕장에서 조개잡이 체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해안에는 넓은 개펄이 발달했는데,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세계자연유산 등재 추진과 함께 강화도의 군조(郡鳥)인 저어새(천연기념물 205호)의 보금자리 마련을 위해 보존을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등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청동기시대 대표적 거석문화, 넓은 판석을 고여 만들었고 그래서 이름 붙여진 고인돌(일명 支石墓) 유적. 강화도에는 15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북쪽의 봉천산·고려산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 중 대표적 고인돌은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사적 137호)’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운반하기 어려운 큰 돌을 수십 리 밖에서 어떻게 옮겨 놓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 고인돌.
우리나라 역사에서 시대를 넘나들며 왕조 유지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치러 왔는데, 그 중 가장 정략적 거점 지역이 강화도였다. 이 때문에 지금은 한반도 역사를 대표할 만한 시대별 문화유산을 오롯이 간직하게 된 국난 극복의 성지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서 중요한 관광지가 됐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심부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당시 호국 불교로서의 역할을 했던 전등사(고구려)·정수사(신라)·보문사(신라) 등이 삼국시대에 건축됐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관련 핵심 유적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그 이유는 고려 수도가 개성이어서 대부분 북한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초지진 전경.
강화도는 당시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년) 강화도로 천도해 원종 11년(1270년)까지 39년간 고려 조정의 왕과 핵심 요인들이 거주했던 도읍지이다. 강화산성, 고려궁터, 왕과 왕비의 능묘(홍릉·석릉·가릉·곤릉)와 고려 대문장가 이규보묘, 그리고 팔만대장경 판각지로 추정되는 선원사, 장정리 봉은사지 5층 석탑 및 석조여래입상 등 대표적 유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도 관청리 궁궐 터에서는 당시 피난 정부의 긴급한 사안을 의논하기 위해 대신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연상된다.

조선시대에는 강화도가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로 등장하는데, 병자호란 이후 외침 방어 목적으로 섬 둘레에 ‘5진 7보 54돈대’를 설치했다. 강화도 주변에는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700여 년 된 관방유적이 있다. 이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소중한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장사각),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던 외규장각 등이 설치돼 지정학적 중요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 온수리 성공회성당 종탑.
19세기 말에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강화도는 서양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현장이 됐다. 프랑스와 싸웠던 병인양요(1886년), 미국과 격전을 벌였던 신미양요(1871년) 등은 가장 대표적 사건이다. 강화전쟁박물관에는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볼 수 있게 전시돼 있다.

강화도 고려궁지 가는 길가 언덕 위 관청리와 길상면 온수리에는 외부는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한옥으로 돼 있으나 내부는 서양의 바티칸 형식을 보여 주는 특이한 형태의 ‘강화 성공회성당’과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있다. 초창기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 양식을 유지해 성공회 및 서양 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며 전래의 관습과 마찰하지 않고 적응하려고 한 흔적이 돋보인다.

이처럼 강화도는 전 시대를 통해 한반도 역사의 흔적을 품었던 역사의 고장이자 국난 극복의 성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강화 교통은 강화읍을 기점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며, 섬 일주를 위한 해안도로가 잘 정비돼 있다. 1970년 처음 강화대교 개통 이후 1997년에는 새로운 강화대교가 완공됐다. 2002년에는 초지대교가 개통됐다. 이러한 연륙교로 인해 수도권에서 강화도로 진입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2014년에는 주변 부속 도서인 교동도와 연결하는 교동대교가 완공됐고, 석모도와 연결되는 삼산대교가 최근 준공돼 많은 관광객이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 일대를 다녀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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