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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그리스 비극 중 ‘안티고네’ 이야기가 있다. 그녀에게는 두 오빠가 있었는데 왕위 다툼 끝에 결국 둘 다 사망하게 된다. 이후 왕좌에 오른 숙부는 두 형제 중 한 사람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 자에 대한 매장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이 땅에 묻히지도 못한 채 들판에서 썩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오빠의 장례를 치른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사울의 아들’은 앞서 소개한 안티고네의 이야기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이 작품은 먼저 간 아이의 장례식을 치러 주고 싶은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을 이야기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헝가리계 유대인 사울은 아우슈비츠에서 ‘존더코만도’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일명 시신 처리반인 이들은 수용소로 들어오는 유대인을 안심시켜 샤워실로 안내한 후 독가스가 살포돼 그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치우고, 피로 얼룩진 가스실을 말끔히 청소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노동의 대가는 약 4개월간의 생명 연장과 곧 죽어야 할 다른 유대인에 비해 조금 나은 숙식 제공뿐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스실에 살아서 들어갔다가 죽어서 나오길 반복하는 여느 날과 다름없었던 오후, 사울은 죽음의 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한 소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미약한 호흡은 나치 장교의 무자비한 손에 빠르게 희생되고, 그것도 모자라 부검이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을 숨죽여 지켜보던 사울은 의사에게 부검 대신 온전한 상태로 아이를 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포로 신분인 부검의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사울은 삼엄한 감시 아래 시신을 빼돌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교 예식을 고집하며 사제 랍비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는데, 자식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애타는 염원은 실현될 수 있을까?

 영화 ‘사울의 아들’은 자식의 장례식조차 꿈꿀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유대인이자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중반부부터 아이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과연 주검으로 사울의 품에 안긴 저 아이는 그의 아들이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해 영화는 그 사실관계를 정확히 말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울이 이토록 한 소년의 주검 앞에 모든 걸 내던진 데에는 그의 직무인 존더코만도와 관계 깊다. 곧 학살의 희생양이 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존더코만도로 지목된 사람들은 마치 가해자의 일부가 돼 조력자로 활동하며 목숨을 연장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같은 유대인에게 죄를 짓는다는 정신적 고통과 머지않아 처참히 처형될 거라는 공포심에 짓눌린 기구한 비극성에 처하게 된다.

 그런 사울에게 한 소년의 기적과도 같은 생존은 일종의 희망을 품게 한 사건이며 가슴 깊이 묻어둔,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동족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이 폭발하는 순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며칠 더 연명하는 삶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처절한 사투는 아니었을까! ‘사울의 아들’은 아픈 역사의 증언과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여운이 긴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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