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당시 병역 의무를 부여받고 참전한 유공자 모두 신분·유형별로 분류해 독립단체를 갖고 있지만 유독 학도병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개선이 요구된다. 사진은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 심종진(82)부회장, 임영환(85)수석부회장, 신현수(83)사무처장(왼쪽부터).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 한국전쟁 당시 병역 의무를 부여받고 참전한 유공자 모두 신분·유형별로 분류해 독립단체를 갖고 있지만 유독 학도병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개선이 요구된다. 사진은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 심종진(82)부회장, 임영환(85)수석부회장, 신현수(83)사무처장(왼쪽부터).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났을 때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젊은 혈기 하나로 전쟁터에 뛰어들었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바람은 하나야. 학도병들의 명예, 그것 하나만 지켜줬으면 좋겠어."

1950년 12월 18일,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인천 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여기에는 여학생 150여 명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하고자 모인 학생들이었다. 당시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조금씩 후퇴할 즈음이었다. 이미 활동 중이던 인천 학도의용대원들도 중공군의 기세에 조금씩 흩어졌고, 보다 체계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학생들은 정식으로 출정식을 갖고 참전하기로 합심했다.

당시 엄희철 대위의 출정보고로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은 부모와 후배, 친구들의 격려를 받으며 곧바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 이들의 나이는 14살 안팎. 많아야 16살이 고작이었다.

수원을 거쳐 마산·통영으로 이동한 학생들은 해병대에 차출되거나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전투마다 돌격대를 맡아 앞장서거나 통신병으로서 군의 정보 전달을 도왔다. 여학생들은 부대에서 잡일을 돕거나 마찬가지로 통신 업무를 수행했다. 어린 나이에도 국가에 도움이 되고자 궂은 역할을 도맡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학도병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병역의무를 부여받고 참전한 유공자 모두 신분·유형별로 분류해 독립단체를 갖고 있지만 유독 ‘학도의용대 6·25참전회’만 공식 단체 승인이 나지 않은 것이다. 학생으로서 활동했다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다. 답답한 마음에 수년간 국회에 이를 위한 법안을 제출하거나 관련 토론회·집회 등을 개최하는 등 많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현재는 그마저도 중단된 상태다.

당시 학도병들은 육군참모총장에게서 ‘학생들이 영장 없이 입대했으며 전쟁이 끝날 경우 모두 학교로 복귀시킨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활동했지만, 이 각서 원본은 없어진 상태다. 이 때문에 현재 학도병들은 단순히 ‘6·25 참전자’로만 대우받고 있다.

임영환(85)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 수석부회장은 "영장을 받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과 병역 의무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국가를 위해 나선 학도병들은 마땅히 구분돼야 한다"며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명예를 인정해 달라는 게 우리의 진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이들은 다시 학도의용대의 합법화를 위한 움직임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 6일에는 전국 단위의 ㈔학도의용군 전우회도 설립됐다. 전국에 흩어진 학도의용대 회원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서다. 인천의 경우 현재 생존이 확인된 학도병은 300여 명에 달한다. 전국(1천여 명)의 3분의 1 수준으로 가장 많다. 이들은 모두 80세 이상으로, 마지막으로 학도병으로서의 명예 회복만 바라고 있다.

신현수(83)사무처장은 "당시 함께 출정식을 가졌던 여학생들의 경우 군번도 없고 자신이 몸담았던 부대도 기억하지 못해 6·25 참전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라며 "국가나 관련 부처에서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우리의 구국정신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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