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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기룡 인천섬유산연구회장 겸 삼산고등학교장
강화도 서쪽에 인접한 ‘교동도’는 큰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의 섬이다. 과거에는 강화도 북서쪽의 창우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갈 수 있었다. 하지만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어 주말을 이용해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교동도를 구경하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의 농어촌으로 시간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교동도는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한강하구에 위치해 한강의 관문 역할 등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한강하구를 장악하기 위한 요충지이다. 개성과 한양을 도읍으로 한 고려와 조선에서도 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이 높이 평가됐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에 비해 그 의미가 많이 상실됐다.

교동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 연산군이 유배 와서 머물렀던 연산군 적거지, 화개산에 있는 화개산성, 조선시대 교동부의 석성인 교동읍성, 남산포 일대에 있었던 삼군수군통어령지와 계류석, 중국 사신들이 교동도 앞을 지나면서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사신당 등이 있다. 특히 화개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치열하게 전투했던 관미성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하지만 교동도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들은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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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바라본 교동도 갯벌.
교동도 주변 바다는 한강·예성강·임진강 하구에 위치하고, 이들 하천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이 쌓여서 생긴 갯벌과 사주 등이 잘 발달돼 있어 다양한 해양생물의 산란지로 생태적 가치 또한 높다.

교동도는 원래 읍내리의 화개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난정리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지석리의 율두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이렇게 모두 세 개의 섬이 간척 공사로 하나의 섬이 됐다. 간척 공사에 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나라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강화에 유입된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화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간척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동도의 중앙에 있는 대룡시장은 1960년대의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시장으로 고즈넉하고 좁은 골목은 우리들을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대룡시장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 고향 장터의 느낌을 준다. 한국전쟁 때 교동도에서 빤히 보이는 북한의 연백 지방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임시 거처로 지은 집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향에 가까운 교동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가지 못한 실향민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해진다.

▲ 거정질화강암 노두.
교동도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선캄브리아대의 결정편암류와 중생대에 이를 관입한 광물입자가 큰 화강암(거정질 화강암)으로 구성돼 있다. 거정질 화강암은 남산포 부근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교동읍성의 남문인 홍예문 성벽을 이루고 있는 암석 중 풍화를 받아 붉게 보이는 암석도 남산포 일대에서 발견되는 거정질 화강암과 동일한 암석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보수한 교동읍성 성벽의 밝은 색 계통의 암석은 강화도 마니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섬록암으로 이뤄져 있다.

교동향교와 화개사로 가는 방향의 갈림길에는 비석 40여 개를 모아 놓은 비석군이 있다. 여기에 있는 비석들은 교동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군데로 모아 놓은 것으로 대부분 교동부사들의 선정비이다. 비석들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석들은 화강섬록암·편마암·대리암 등으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교동도는 이루고 있는 암석도 편마암류, 변성대리암 등과 이를 관입한 화강암으로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리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교동도 간척지 논 가장자리에는 물이 풍부한 홍수 때 물을 저장했다가 가물 때나 모내기와 같이 물이 필요할 때 용두레로 물을 퍼서 사용했던 소규모 물 저장고가 있었는데, 이를 교동에서는 ‘물꽝(물광)’이라고 한다. 현재 교동도에서는 큰 저수지와 관개시설 확충 등으로 예전에 많이 있었던 물꽝이 대부분 없어지고 1~2개 정도만 남아 있다. 물꽝은 여름에 수영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지치며 봄과 가을에는 물고기를 잡아 철엽을 하는 아이들의 추억 놀이터였다.

▲ 강화향교.
교동도에는 조선시대 한증막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돌로 쌓아 만든 속이 빈 무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한증막은 내부에서 나무를 태워 돌을 뜨겁게 달군 후에 재를 꺼내고 생 소나무가지를 바닥에 깔고 들어가서 땀을 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한증막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설치돼 있는데, 이는 땀을 낸 후 흐르는 계곡물에 땀을 씻어 내기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80년대의 교동도 주민들은 한증막을 직접 사용했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돌담으로 이뤄진 화개산성과 조선시대의 봉화대 터와 청동기시대의 암각화를 관찰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석모도가, 남서쪽으로는 주문도·볼음도·서검도 등이, 북쪽으로 북한의 연백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 대룡시장.
교동도 남동쪽 해안가 옛 교동교회 부근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훈맹정음)를 완성시킨 박두성 선생의 생가 터가 있다. 이곳에 들러 선생의 시각장애자를 배려하며 살아오신 삶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클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교동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찾아 살펴보면서 가족여행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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