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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진 전 인천안산초 교장
백화점이나 은행에 가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안내하는 사람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며 반갑게 맞는다. 친절한 마음을 서로 나누는 무언의 대화 속에 인성의 기본 틀이 형성된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데 친절한 생활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나 실천 또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루의 일과에서 남에게 친절하게 선행을 베풀거나, 친절한 모습으로 나를 대해 줄 때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유대인에게 친절과 선행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 이전의 종교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가정에서는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가정교육을 받아온 유대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친절과 선행은 여호와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공공심(公共心)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신앙으로 돼 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임금님이 그의 신하 한 사람을 빨리 오도록 명령한다. 그 신하는 임금의 명령에 두려움을 느껴 동행을 친구에게 요구했다. 한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고, 또 한 명은 그렇게 가깝지 않은 친구이고, 나머지 한 친구는 더욱 가까운 친구가 아니다. 첫 번째 친구에게 동행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한마디로 거절한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니 대궐 문까지만 동행해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 가깝지도 않은 세 번째 친구는 뜻밖에 "자네의 청이 그렇다면 함께 가주지"하고 선뜻 응해줬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는 재산으로 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으로 여기며, 세 번째 친구의 행동은 선행으로 본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이나 옳고 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공의(公義)의 선행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고, 선행이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의 이야기다.

이렇게 유대인의 친절과 선행 교육은 공공적(公共的)인 성격으로 강조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선행을 중시한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적인 관점에서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정신적인 보상을, 개인을 위한 선행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선행을 당연시하는 유대인의 가정교육을 본받아야겠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그들의 마음속에 친절과 선행의 진실을 알고 실천한다. 이렇게 형성된 친절과 선행은 도덕적 가치를 넘어 이성적인 판단보다 청소년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감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옛부터 우리나라의 가정교육에서도 매사에 착한 마음씨, 친절, 선행을 무척 강조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칭찬할 때 ‘똑똑하다, 기특하다’는 말보다 ‘착하다’는 말을 더 많이 쓴 것 같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옛이야기도 대부분 착한 마음씨와 선행을 강조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한 이야기로 보아 친절과 선행 교육은 옛날이나 현재나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예의범절이다. 예불유절(禮不踰節)이란 말이 있다. 예의는 절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도를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아첨에 가깝게 되고, 때로는 실례가 되는 수도 있다.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 친절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이기심만을 자극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릇이 큰 사람은 남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으로 삼으며, 자신이 남에게 의지하고 남의 호의를 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했다. 내가 남에게 베푸는 친절은 그만큼 자신이 그 사람보다 낫다는 말이 되지만, 남의 친절을 바라고 남의 호의를 받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도움을 청할 때도 물론 있으나 간사한 마음에서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친절이란 몰지각한 사람의 잘못이라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는 힘이다. 친절과 선행은 자신의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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