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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제 전 불은초교장
촛불 민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낸 우리 사회가, 청문회에 등판하는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길잡이가 되겠다는 고위 공직자들의 언행불일치와 불미스러운 과거 행적들이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행태도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리현상인 세금탈루, 음주운전,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등이 대다수이다. 그 시대에는 자신뿐 아니라 대부분 그랬다는 식의 해명도 참으로 궁색하다. 그러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청문회에 오르는 고위 공직 후보자들은 그야말로 우리 사회 최고 수준의 학력과 지성, 경력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겠다는 사람들이다.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바르게 행사해 사회의 비리를 척결하고, 개혁을 주도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과 행동이 다르고 배움과 실천이 다른 사람들이, 국가의 요직에 앉아 제대로 된 개혁을 하고 공정한 사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배움의 목적을 지행합일에 두었던 선비정신과, 말과 행동이 다름을 배척하고 정직과 신의가 기본 도리이며, 사회 유지의 주춧돌이었던 민족 문화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 버린 것인가?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원의 풍습을 폐지하고, 성리학(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도덕적 통치를 위해 성리학을 강요하게 되고, 성리학을 과거 합격을 위한 학문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차 심화되어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등장했다. 왕양명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태어났을 때의 착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음의 움직임이 곧 이(理)의 구현이며, 앎이 실천의 시작이요, 실천은 곧 앎의 완성이라고 주장했다. 양명학은 주희의 ‘선지후행’과는 다른 ‘지행합일’을 강조하고,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보다는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중시했다. 이러한 양명학의 사상은 사대부 계층뿐만 아니라 서민과 상공업자들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동양 철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學不倦(학불권) 所以治己也(소이치기야) :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敎不厭(교불염) 所以治人也(소이치인야) :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남을 다스리는 것이다.

 시자(尸子)는 권학편에서 배움은 자신을 다스림이요, 가르침은 남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배우는 것과 실천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학문이 관념에 빠져 글자의 자구(字句)나 해석하고 그럴듯한 이론이나 늘어놓으면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풍토를 배척하고 실천을 강조했다. 제자들에게 강의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토론식으로 수업하여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도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온갖 경험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깨닫도록 했다. 그렇게 깨달은 후에 남을 가르치거나 지도자가 되라고 이른다. 이것이 바로 ‘學行一致(학행일치)’이다.

 言行一致(언행일치)가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는 언행일치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거짓된 언행을 하는 경우가 흔한 사회이다. 그 원인은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과 승자 독식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바람직한 사람을 만들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당하려면 ‘학행일치’가 교육의 바탕이 돼야 한다.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學行一致(학행일치)’를 기반으로 교육한다면, 배움이 많을수록 ‘言行一致(언행일치)’가 이뤄지고, 점진적으로 ‘知行合一(지행합일)’에 다가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행합일에 이른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될 때 나라다운 나라, 정명(正名)한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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