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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치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자기만의 기준이 있겠지만, 결핍에 대한 해결은 행복과 직결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는 5단계로 인간의 욕구를 구분했다. 1차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해결 욕구가 있다. 이것이 충족되면 인간은 안전한 삶에 대한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 이후 관계 맺기를 통한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과 애정의 욕구를 채워 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실현된 뒤에도 우리는 또 다른 갈증을 느낀다. 바로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존경에 대한 욕구와 자아실현에 대한 염원이다. 개인이 가진 재능과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창조적으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매슬로는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위치한다고 봤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방랑기’는 일본의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1920년대 당시 가난하고 궁핍한 노동자로의 삶 속에서도 자아실현이라는 최대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행상인 부모를 따라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후미코는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악착같이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늘 부족했다. 그녀의 소원은 매번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계속되는 면접과 연속된 낙방 소식에 지친 더운 여름, 시원한 국수 한 그릇만 먹을 수 있다면, 고된 노동 끝에 돌아온 집에서 단무지 한 점과 수북한 쌀밥 한 그릇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후미코는 부질없이 입맛만 다셨다. 배고픔에 지친 일상 속에서도 그녀의 유일한 낙은 책 읽기였다. 의무교육만을 겨우 마쳐 내세울 학식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하루와 배고픔을 시로 표현해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다.

 직종을 마다 않고 고군분투하던 중, 노쇠한 부모의 생활비마저 떠안게 돼 결국 수입이 조금 나은 호스티스가 된다. 그곳에서 만난 시인과 작가들 중 일부는 후미코의 남편이 됐지만, 삶에 대한 그녀의 억척스러움과 뛰어난 글쓰기 재능은 연약하고 무능한 남성들과 갈등을 빚으며 언제나 삐걱거렸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육체적·감정적 허기에 떠도는 그녀의 곤궁한 유랑은 문인 등단의 꿈을 이뤄 행복하게 정착할 수 있을까?

 1962년작인 영화 ‘방랑기’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 묘사에 탁월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으로 1928년 출간된 하야시 후미코의 일생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일본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인 「만국」과 「번개」를 이미 영화화한 바 있는 미키오 감독의 ‘방랑기’는 그의 페르소나인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때문에 영화 ‘방랑기’는 미키오 감독만의 차별화된 세계관과 그만이 선보일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의 진수를 선사하는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작품 속 후미코는 힘든 삶 속에서 순간순간 짧게나마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녀의 꿈이 삶의 피로를 덜어준 것이다. 진흙탕 속의 삶일지라도 그녀는 글을 쓰며 늘 되뇌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꿈꿀 수 있기에 그녀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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