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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계봉 시인
노인들은 늘 자신의 병에 대해 의사보다 해박하다. (물론 실재 의학적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니 오해 없기를) 병원을 찾을 때, 노인들은 이미 자가 진단과 처방까지 끝낸 후, 의사를 만나서는 사후 추인을 받으려 한다. 만약 의사가 해당 증세에 대해 노인 스스로 내린 진단과 다른 말을 하거나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을 경우, 안타깝게도 그 의사는 졸지에 ‘돌팔이’ 의사로 전락하고 만다.

 이를 테면 숨이 가뿐 증세로 의사를 찾았다면 담당 의사는 "천식 증셉니다. 숨이 무척 가쁘셨죠?"라든가, "많이 힘드셨지요. 하지만 잘 치료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풀어가야지, "이 정도의 증세는 별로 심각한 게 아닙니다"라거나 혹은 "천식이요? 숨 가쁘다고 다 천식은 아닙니다. 다른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니 검사 한 번 하시죠"라고 말하면, 설사 그러한 발화의도가 병의 심각성을 말하는 것보다 심상(尋常)하게 말하는 게 심리적으로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더라도, 그 순간 의사는 노인에게 있어 불신덩어리 돌팔이 의사가 되는 것이다.

 노인들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길 바란다. 특히 자신이 앓고 있는 병통(病痛)에 대해 구체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의사들 앞에 서면 그러한 소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러면서 현재 겪고 있는 가공할 고통을 자신이 얼마나 대범하게, 자식들 눈치를 보며, 눈물을 참고, 인내심을 가지고, 잘 참아왔는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치, 손톱을 가볍게 찧고 와서 "호~, 해주세요"하는 어린 아이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린 아이는 엄살이 8할이지만, 노인들은 정말 불편하고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사정이 위와 같다면 노인들은 결코 까다로운 환자가 아니다. 당장 수술이 필요한 심각한 질환이나 골절이나 타박상과 같이 눈으로 확인이 되는 부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의사로서는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울고 웃는 노인들이 상대하기 훨씬 수월하고 치료 효과도 높게 나타날 수 있는 환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플라세보(placebo) 효과가 노인들에게서 크게 나타나는 것도 이런 노인들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어머니를 모시고 집 근처 K병원으로 정기 진료를 받으러 갔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담당 의사들이 하나 같이 참 멋대가리가 없다는 것이다. 손자뻘밖에 안 돼 보이는 나이에, 툭하면 반말하고, 귀찮다는 듯이 던지는 무성의한 답변과 사무적인 말투들. 그동안에는 ‘업무가 많아서 피곤한 모양이군’하고 성인군자 모드가 되어 화를 눌러 참아 왔는데, 그날은 "원래 노인들은 궁금한게 많잖아요. 그 만큼 불편하니 묻고 싶은 게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하고 정색을 했더니 의사가 나를 힐끗 보고 난 후 태도를 바꿨다. ‘쫀(존)’ 게 분명했다. 나도 그 정도에서 ‘쫄(졸)아’ 준 의사가 고마워 더 이상 확전을 자제했다.

 사실 병원에서는 직원이나 의사들의 친절함과는 무관하게 환자가 언제나 심정적으로 을이다. 지극히 구체적인 통증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에 그 대가를 ‘과도하게’ 지불함에도 불구하고 편안함을 빚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을로서의 모멸과 서러움을 겪지 않으려면 병원 찾을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유한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이 하나둘씩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결국은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을. 어쨌든 찻잔 속 태풍 같은 저항이었겠지만 이날 나는 을로서의 서운함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번 진료 때는 담당의사의 태도가 달라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의료 현장에는 친절하고 능력 있는 의사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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