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웅 변호사.jpg
▲ 한재웅 변호사
지난 20일 인천지방법원 최한돈 부장판사가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6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는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의 추가 조사를 의결하면서 이를 담당할 현안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에 최한돈 부장판사를 선출 한 바 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은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추가 조사 결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최한돈 부장판사는 사직서를 제출한 뒤 법원 내부 통신망에 글을 올려 사법부 내에서 은밀히 이뤄지는 법관에 대한 동향파악은 명백히 법관 독립에 대한 침해이며, 추가조사에 대한 거부는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마지막 자정의지와 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은 법원의 최고 요직인 법원행정처로 발령받은 한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일선 판사들에 대한 뒷조사 파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반발하면서 붉어졌다. 문제를 제기한 판사는 발령 당일 원래 있던 법원으로 복귀(겸임해제)됐다. 의혹이 생기자 법원진상조사위원회에서 문제가 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 자료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으나 법원행정처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제대로 된 조사가 될 리가 없었고, 의혹이 점점 커지자 추가조사를 요구하는 판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판사들은 대표를 선출해 전국법관대표회의를 개최한 뒤 압도적인 찬성으로 추가 조사를 결의했으나 대법원장이 거부한 것이다.

 법관의 독립성은 헌법 제103조에 명시된 헌법적 요구이며, 민주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중 하나이다. 법관의 독립성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필요적 전제이므로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며 권력분립을 통한 민주주의 수호의 조건이다. 법관의 독립성이 훼손되면 정치와 시장의 권력자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민주적 제도가 붕괴되는 것이다.

 법관의 독립성은 단순히 법관이나 사법부의 권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헌법적 가치 중 하나이다. 독재정권 시기에 있었던 ‘사법파동’을 중대한 헌정질서 파괴 행위로 평가하며 사법 비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원이 상명하복의 관료조직이 되어 버린다면 관료 조직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 개인의 독립성만 남고 법관의 독립성은 고사될 것이 자명하다. 사법부 내부적으로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은 외부적인 권력으로부터 법원을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번 사건처럼 법관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에 대한 성향이나 동향을 뒷조사하는 것은 인사권을 이용한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고 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므로 당연히 법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법원 스스로 문제점을 노출한 것이므로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헌법적 요청이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체계를 통해 나쁜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싸워 스스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건강한 조직은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판사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표를 선출해 전국법관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통해 의혹 없는 조사를 요구하는 것은 법원이 아직 건강하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최한돈 부장판사를 비롯한 많은 판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법원 조직의 백혈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법관의 독립성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는 대법원장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합리적인 의혹을 덮으려는 시도는 더 큰 의혹만 잉태한다. 지금이라도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지시해야 한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이 사건을 법원 내부의 문제로만 보고 적당히 무마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법관의 독립성 보장은 법관의 권리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다. 많은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