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對如流(응대여류 )/應 응할 응/對 대할 대 /如 같을 여/流 흐를 류

남조(南朝) 때 서면(徐勉)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했으나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이미 제문(祭文)을 지었으며, 18세에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 제주(祭酒)는 서면을 두고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면서 재상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서면은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다.

 당시의 양나라는 북위(北魏)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서면이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없었다. 식구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자주 귀가해 쉴 것을 권하자 서면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잊었으므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이 일도 전해질 것이다." 서면은 늘 부하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공로를 모두 부하들에게 돌렸다. 서면은 집무하는 책상이 공문으로 넘치고 방에 손님이 가득해도, 물 흐르듯이 응대했으며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應對如流, 手不停筆). <鹿鳴>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