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16세의 나이로 부평의 일본육군조병창에 강제 징집돼 고초를 겪은 지영례 할머니. 지 할머니는 최근 부평공원에 제막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이병기 기자
▲ 일제강점기 16세의 나이로 부평의 일본육군조병창에 강제 징집돼 고초를 겪은 지영례 할머니. 지 할머니는 최근 부평공원에 제막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이병기 기자
"그때는 조병창 안 의무실에서 일했어. 어린 나이에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허드렛일을 도왔던 거지. 조병창에 같이 간 친구들은 공장도 가고 그랬는데, 나는 오라버니 친구가 있어서 병원에 가게 된 거야. 거기엔 팔 잘리고 다리 잘린 사람들이 왔어. 끔찍했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사람들이었어."

지영례(89)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당시 집 근처인 부평의 일본육군조병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위안부를 징집하기 위해 집집마다 어린 여성들의 이름을 적어갔다. 지 할머니는 공장에 들어가면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조병창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16세, 학교도 중간에 그만둬야 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당시 육군조병창을 부평 한가운데에 건설했다. 1930년대 중반 용현동과 학익동 일대에도 공장 건설이 시작됐다.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추진하던 일본은 중공업 공장들을 인천에 적극적으로 세웠다. 바다를 매립한 땅은 일본의 대자본에 팔려 공장 땅으로 분양됐다.

인천은 무기 등 군수물자를 만드는 거대한 공장지대가 됐다. 100여 개의 작업장과 현장은 침략전쟁을 위해 가동됐다. 전쟁의 광기 아래 인천은 노동자들의 도시가 됐다.

일본은 1938~1945년 전시체제 당시 한반도는 물론 남사할린, 중국, 만주, 태평양, 동남아시아 등 그들이 식민지로 지배했거나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강제 동원을 진행했다. 현재까지 인천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노동자는 151명이 확인된 상태다. 지영례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다.

"한 3년 동안 일했던 것 같아. 일본인들은 조선 노동자들을 사람 취급도 안 했어. 아예 무시했지. ‘내려’ 봤던 거야. 자기들 말만 하고 우리 얘기는 듣지도 않았어. 해방이 되고 얼마나 좋았던지. 다시는 조병창에 나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들도 꼼짝 못했어."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은 연필 대신 망치를 들었다. 교실 대신 공장 선반 앞에 서서 쇠를 깎고 기름을 칠했다. ‘학도동원’이란 명목으로 교복을 벗고 ‘공원(工員)’이 됐다. 남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무기를 들고 다시 공장을 떠나 전쟁터로 향했다. 1944년 4월 28일 일본은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에 기초한 학도동원실시요강을 발표했다. 인천은 동원령이 최초로 적용된 지역이었다.

매일신보는 1944년 5월 7일자에 ‘경성공립공업학교(경성공업), 인천공립공업(인천공업), 인천공립중학(인천중학), 인천공립상업(인천상업) 등 4개 학교에서 250명이, 인천공립고등여학교(인천고녀), 인천소화고등여학교(소화고녀) 등 2개 학교에서 110명 등 총 360명의 남녀 중·등교생도들이 여기에 선발됐다’고 보도한다.

지영례 할머니와 조병창에서 함께 일하면서 조선독립당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후 사망한 이영현 씨의 사연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이 지난 12일 부평공원에서 제막됐다. 지 할머니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줘 고맙다"고 말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