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진.jpg
▲ 박태진 여주경찰서 정보계 경사
무거운 주제에 대한 글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서는 그 범주(무거운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는 삶의 존재 이유가 좀 더 근원적인 곳에 있고 이를 탐구하는 학문분야인 인문학이 그 담담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삶의 영역의 대부분을 소유라는 단어로 개념화해 온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이에 서양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TO HAVE OR TO BE」라는 책을 통해 설명했듯, 현재 우리들 삶의 영역은 소유라는 개념으로 포장 아니 몰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참혹한 사건들의 정점에 바로 이 소유라는 개념의 마귀가 조종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유와 존재 그리고… 경찰관,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성립돼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각종 참혹한 사건을 마주하는 경찰 그리고 그 본질적 원인 요소인 소유, 마지막으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개념인 존재, 여기서 잠깐 소유와 존재 그 어렵지만 우리가 반드시 되뇌야만 할 두 단어에 대해 마주해 보기로 한다.

 존재와 소유(Being·Having)로 단순히 표현되기에는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많아 잠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처음에 잠시 언급했듯 산업화는 우리 삶을 물질만능주의로, 다시 말하면 소유의 삶으로 점철시켜 왔으며 우리는 현재 이것을 위해서 종착점 없는 달리기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 그리고 그 무엇을 우리는 가지려고만 한다. 그리고 가진다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이 소유의 치열함이 현재 우리 삶에 많은 생채기들을 내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경찰이 마주하는 아동학대와 살인, 묻지마 폭행 등의 정점에는 바로 소유라는 괴물이 있어 우리 삶을 조종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돌아온다.

 여기에 바로 존재라는 간단하고도 심오한 답을 내놓는 이가 바로 인문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삶의 지표이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에리히 프롬 역시 그 답을 인문학과 철학에서 찾은 것이다.

 한편, 이 존재라는 단어인 Being은 영국 유명가수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바로 비틀스의 ‘Let it be’이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냥 내버려 둬"로 표현되지만 조금 더 그 뜻을 들여다보면 "이미 성모 마리아는 내 마음에 존재하니 나를 너희의 소유를 위한 도구로 보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 우리 각자의 삶이 물질적 소유에 따른 풍요로움 속에서 과연 행복과 삶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제대로 관조해 가고 있는지, 다들 가슴 한편에는 주먹만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어느 성직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는 그 상처를 보듬기 위해, 나와 가족과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소유라는 폭행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 존재라는 소중하고도 고귀한 화두를 나에게 과감히 던져 본다. 바로, 가지는 물질적 행복보다 느끼는, 존재 그 자체의 행복을 위해….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