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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실 대한결핵협회 인천지부장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어느 고등학교와 다르게 공립이면서도 초대 교장 선생님이셨던 길영희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이 별도로 원로 선배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정식으로 ‘길영희 기념사업회’로 발전됐다. 해마다 봄에는 탄생 기념행사, 음악회, 가을엔 독후감 발표회 등 이런저런 행사를 치른다.

 길 선생님이 갖고 있던 교육자 정신을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간절한 마음이지만 선생님이 정년하고 교육현장을 떠나신 지가 반세기가 넘었기에 이제 선생님에게서 직접 배움을 가졌던 가장 어렸던 제자도 벌써 80에 가깝다.

  60년대 이후 졸업생은 선생님에 대해 선배들이 들려주었던 옛날이야기로 들으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 제자 중에는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을 지닌 친구가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피하고 싶은 친구도 있고, 입 다물고 있는 친구도 있다. 나 자신은 학교 다닐 때 그저 눈도 맞출 수도 없는 어른이었기에 그냥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이었다.

 2009년에 필자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등 떠밀리다시피 기념사업회장 자리를 맡게 돼 여간 계면쩍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교육계 선거에 출마한 필자를 도와주고픈 잊을 수 없는 선배님과 후배들이 동문들이라도 묶어 도움 받으라는 고마운 뜻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동문들은 단지 3월 1일날 선생님 묘소에 참석하고 수락만 하면 도와주고 할 수 있도록 할 테니 부담 없이 해도 된다고 정말 편하게 대해 주었다. 당시 정신 없이 선거랍시고 딴전을 피던 부끄럼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도와주던 선배님 그리고 후배 겸 제자들이 여간 고맙지 않다. 선거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도와주었지만 뒤에 어쩔 수 없는 개인사정으로 접으면서 지금도 만나면 늘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는 후일담에, 그때 그렇게 했으면… 하는 후회도 있다. 당시에 돕던 후배가 동문선배들 모임에 찾아가 화끈하게 돕기를 청하며 응석 비슷하게 꼬장(?)을 부렸기에, 선배에게 대들어 버릇없다고 두고두고 날 세우고 뒤에 한번 혼내겠다는 잘난 선배도 있었다.

 모두 길영희 선생님 교육 이념을 연결해주고픈 선배들의 프로젝트로 다른 학교와 다른 이색 이벤트이지만 가끔은 생각지 못한 이런 해프닝으로 비칠 때도 있다.

 기념사업회가 적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직접 배우지 않은 후배도 참여하면서 이젠 전국 규모의 독후감 대회를 열 땐 출신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느낀다.

 더욱이 후배들에게 길 교장 선생님이 교육 현장에서 하려고 했던 교육은 당시로서는 힘들었지만 실현하고자 했던 교육 정신인 ‘流汗興國(유한흥국)’, ‘學識(학식)은 사회의 등불, 良心(양심)은 民族(민족)의 소금’, ‘無監督考査(무감독고사)’, ‘無補缺生(무보결생)’ 등은 당시 널리 퍼져있던 음산하고 부패한 사회분위기를 맑고 신뢰하며 정직하게 살고자 했던 올곧은 선비정신이었다.

 길영희 기념사업은 같은 교정에서 짧지만 3년이라는 사춘기와 청년시기를 지냈기에 더욱이 감수성이 강한 시기에 정의감을 심어주어 바른 사회 구현을 위한 모교 정신을 모교 발전과 후배들에게 주기 위해 시행하는 사업의 일환으로서, 그 사업의 정신을 잇고 싶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선배들이 자칫 딴 길로 갈 수 있는 어린 학생을 격려해서 사회에 나가 제몫을 훌륭히 해내고, 도와주며 일깨우는 가치있는 지도자를 기르는 교육의 즐거움이 되고 어느 누구도 낙오될 수 없도록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교육, 즐거움과 보람이 되는 사업이다.

 길 교장 선생님의 교육은 개인의 영달을 넘어 사회와 국가의 지도자가 될 인재를 양성해야 할 학교로 꿈을 꾸었고,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한 한 사람 한 사람은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졸업생이 되는 사업으로 오늘의 길영희 기념사업회가 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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