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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전오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지나간 유행가가 있다. 사랑을 잉크로 쓰면 깨끗이 지워지지 않기에 연필로 쓰라고 했다. 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우리 도시를 연필로 그렸던 것 같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지우개로 남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마구 지우고 내 맘대로 새로 그려보고 또 그려 보면서 이상도시를 맘속에 형상화했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지속가능하게 어우러져 사는 생태도시 이상이 내 맘속에 그려져 있다.

 도시 개발을 주도하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맘속에 그리고 대학을 떠나 도시라는 현장에 투입될까? 그들도 그들의 이상에 따라 내가 그렸던 그림을 모두 지우고 빠른 도로와 높은 건물을 그려 두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발 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도시를 지우개로 모두 지우고 새로 그릴 수가 있을까? 우리 도시에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이 정도의 도시를 만든다고 얼마나 많은 노력과 예산을 썼는데 우리 도시를 다 지울 수 있을까? 도시는 연필로 그려진 그림이 아니다. 도시는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그려져 있다. 지우개로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분야별 계획이 도시정책으로 발표되고 나면 이를 주워담기는 쉽지 않다. 발표된 이상 도시정책은 시민에 대한 약속이고 약속이 공개되는 순간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수많은 이해 당사자가 생기기 때문에 약속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긍정적인 정책이든, 부정적인 정책이든 되돌리는 순간 공공은 신뢰를 잃게 되고 신뢰를 잃은 공공은 사회갈등을 조절할 힘을 잃게 된다.

 젊은 날 대학에서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었다. 교수님들은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유학하셨거나 선진국 사례를 많이 연구했기 때문에 우리 여건에서 볼 때 꿈과 같은 도시를 예로 보여주고 우리 도시문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도시는 참고할 수 있을 지라도 그곳을 기준에 두고 우리 도시를 비판하는 것이 답일까? 그 답에 따라 우리 도시를 모두 지우고 새로 그릴 수는 있는 것일까?

 미국의 도심은 바둑판 같다. 그래서 1번가, 2번가 하는 방식으로 도로에 번호를 붙인다. 유럽의 멋진 성은 언덕 위에 있다. 선진국에서 보여지는 이런 외피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65% 이상이 산이다. 도시와 마을들은 이 산과 어울려 배치됐다. 도로는 구불거렸지만 자연의 곡선을 따랐다. 겨울철엔 북서풍이 무지 차갑게 불어온다. 그래서 배산임수, 장풍득수를 택했고 바람을 피해 산자락에 마을과 집을 배치했다.

 서구에서 배운 이론을 적용한 도시계획이 우리의 자연을 무참히 밟아 왔다. 택지를 개발하면 제일 먼저 산을 깎거나 없애서 성토와 절토 양을 맞춰 평지를 만들고 바둑판처럼 길을 낸다. 언덕 위나 경관이 좋은 곳에 호텔, 펜션 등을 배치해 전체 자연경관의 흐름을 깨고 경관을 사유화, 독점하는 개발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기까지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도시가 변해온 지우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시행착오를 한다. 우리 도시도 수많은 시행착오을 겪으면서 오늘 우리 시민들에게 보여지고 경험되고 있다. 런던 스모그가 상징하듯 유럽의 도시도 수많은 문제와 시행착오을 겪으면서 오늘에 왔을 것이다. 우리 도시도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와 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오늘의 인천을 지우개로 모두 지우고 새로 그려서는 아니 된다.

 어떤 정치가든, 행정가든, 전문가든, 시민이든 시행착오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서로 소통해야 한다. 제한된 정보, 제한된 생각으로 결정된 도시 정책은 시행착오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정보 개방, 생각 공유, 소통과 토론을 통한 집단 지성을 형성해 잉크처럼 지우기 어려운 도시정책을 창의적이고 정밀하게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약력

 서울시립대·대학원, 공학박사(환경생태학 전공),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한강유역환경청 자연경관 심의위원·환경영향평가 검토 자문단 /◈ 연구보고서 ; ▷친자연적인 송도신도시 건설을 위한 녹화지침 연구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른 실천방안 ▷자연환경계획과 도시개발계획의 연계방안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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