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와 쓰르라미가 목 터져라 울어대는 느티나무 정자 아래서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르신 서너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허름한 반팔 남방에 모 농약회사 이름이 새겨진 낡은 모자를 눌러 쓴 이들 앞으로 희망요양원이라고 쓴 봉고차 한 대가 좁은 농로를 비틀거리듯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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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은 측은한 눈빛을 보이더니 이내 한 어르신이 입을 연다. "어이, 김가야 너도 저 건너 언덕 위에 허옇게 보이는 요양원에 가고 싶냐?" "야, 박가야 뭔 소리여, 나는 오두막집에 혼자 살아도 여기가 좋아, 그래야 이렇게 옛 동무들과 말품 팔면서 시간 때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저 농로 길 넓힐 때 부역까지 하면서 왜 땅을 희사했는지 모르겠어. 저런 요양원 차량 드나들라고 희사한 것은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급하네…." 하면서 한숨을 짓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들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마을 안길 확장사업에 아끼고 아끼던 농지를 희사했다. 좋은 말로 희사지 당시 지서장과 면서기들의 강요에 의해 정부에 사실상 강제 기부채납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부역이란 동원령에 의해 정부로부터 돈 한 푼 안 받고 가래질과 리어카 등 맨몸으로 좁은 논두렁 밭두렁 길을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농로로 넓힌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이 나라가 일본에 점령당하고 강제 징용과 부역, 그것도 모자라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공출로 다 뺏기는 수모를 겪은 세대이다. 그리고 해방 후 독립국가의 참국민으로서 행복도 잠시, 분단의 아픔과 한국전쟁의 참상, 민주주의 혼란을 체험한 어쩌면 불우한 세대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산업화 과정의 선봉자였으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이들에게는 항상 노동력을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헌납했다. 전쟁 후 민둥산이 되어 버린 험한 산을 찾아 다니며 산림녹화를 위한 부역에 동원됐고 저수지 준설, 신작로 사리도부설 사업, 송충이잡이, 싸리 씨와 잔디 씨 채취, 마을 공동 퇴비증산 부역 등 심지어는 인구 폭증으로 인해 초등학교, 중등학교 시설이 부족하자 학교 건립을 위한 부역에 동원됐다.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청산이 유행어처럼 나돈다. 적폐청산이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부정적 현상이나 요소를 깨끗이 정리한다는 의미로 인적 적폐청산과 물질적 적폐청산 그리고 제도적 적폐청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역은 제도와 물질이 혼합된 적폐청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적 적폐청산은 정치적 오해의 성격도 있겠지만 물질적, 제도적 적폐청산은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집행해 산업화 세대들이 제공한 부역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잘못된 과거의 역사로 희생을 당한 자들이 있으면 그 대가를 이제는 보상해줘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에는 분명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나와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부당하게 동원된 부역은 하나의 채무에 해당되므로 헌법상 대한민국의 적통을 이어받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이들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현재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거의가 많든 적든 간에 이 나라에 부역의 노역을 제공했다. 국민 1인당 소득, 100달러 미만의 불모지에서 현재 3만 달러를 육박하고 있는 공적에는 분명 산업화 세대가 그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이제는 잘사는 나라로 도약한 우리나라의 대주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젊은 세대의 짐이 돼 눈치 보는 세대로 전락해 있다. 최근 언론매체들이 쏟아 낸 뉴스를 보면 ‘위기의 한국, 고령화로 50년간 재정 지출 140조 증가’라는 자극적 보도로 어르신네들이 눈칫밥 먹는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보상은 개별적 보상과 포괄적 보상이 있다. 이들은 개별적 보상을 원치 않는다. 이제 정부는 국가와 자녀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어르신에 대한 노인기초연금과 각종 노인 관련 복지제도를 현실화해 이들이 떳떳하게 행복한 여생을 즐길 수 있도록 포괄적 보상을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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