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李吉用)기자의 흉상이 세워진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아, 이길용 선생!’하며 눈을 감았다. 그것은 지난 9일자 보도였다. 기사에는 ‘한국인 일깨운 두 영웅 81년 만의 해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손기정 선생과 이길용 기자에 관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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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손기정(孫基禎)선생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역대 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의 우승이었고,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로 올림픽신기록이었다. 한국이 낳은 마라톤 영웅의 쾌거였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 선생의 우승 시상식 사진은 일본 동경에서 먼저 보도됐다. 그러나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 동경 현지 언론을 통해 구했다는 사진인데 손 선생 가슴에 뚜렷했던 일장기는 인쇄 잉크 찌꺼기처럼 거무스름하게 지워져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있던 이길용 기자가 주동해서 일장기를 말소해 버렸던 것. 엊그제 읽은 기사 표현 그대로 ‘한민족의 저항정신을 일깨운’ 또 다른 영웅의 거사였다.

 이 거사 때문에 동아일보는 그 이틀 후인 8월 27일부터 무기 정간을 당했고, 9개월을 넘긴 이듬해 6월 2일에야 복간할 수 있었다. 물론 이길용 기자는 해직되고 투옥까지 됐다. 그는 광복이 될 때까지 동아일보에 복직할 수 없었다.

 이 두 영웅이 81년 만에 해후한다. 다름 아닌 서울 종로 손기정기념관에 8월 25일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25일은 바로 이길용 기자가 손기정 선생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민족의식을 고취한 그날이다.

 필자가 지난 3년 동안 근무하던 사무실에 이길용 기자의, 이길용 선생의 사진을 걸어뒀던 것은 단순한 일장기 말소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인천이 낳은 사회계몽가요, 항일운동가이면서 대 신문기자요, 영원한 대한민국의 체육인을 나름대로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길용 선생의 고향은 인천 우각리이다. 본적은 경기도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 192번지다. 인천 내리의 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을 마치고, 일본 경도(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예과 1년을 수료했다. 용산철도강습소(龍山鐵道講習所) 6개월 과정을 마친 기록도 있다.

 「왜정인물」 1권은 선생의 주요 경력을 "철도강습소 수료 후 대전역 개찰원, 1920년 4월 대전에서 ‘3·1운동 1주년 축하 경고문’ 배포 사건으로 징역 1년2월 수형, 1921년 6월 출옥 후 동아일보 통신원, 대전철우회(大田鐵友會) 총무, 1923년 6월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 인천제물포청년회 회장, 이우구락부 평의원, 인천영화학우회 간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교 재학·졸업생이 모여 1920년께 창립한 인배회(仁培會)의 활동도 있다.

 이 경력란 아래에 일본 경찰이 쓴 주(注)에는 "항상 배일적(排日的) 언동을 자행했던 자"라는 기록이 있다. 선생의 외모와 인상에 관해서도 "키 5척 1촌.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앞쪽 윗니에 금니가 있음.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고취·선전할 우려가 있음"이라고 적고, 특히 요시찰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가 이길용 선생을 이렇게 요시찰 인물로 강조할 만큼 선생의 항일정신은 1920년 대전에서의 경고문 살포 사건 이후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이르기까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8·15 광복 후 선생은 동아일보에 복직해 사업부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 고문,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야구 발전은 물론 역기연맹(力技聯盟, 역도연맹), 씨름협회 등을 결성해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도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대한체육사」 집필에 전념하던 중 1950년 6·25가 발발하고 그해 7월 납북돼 생사 불명이 된다. 이후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그의 업적을 기려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25일 열리는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 및 이길용 기자의 스포츠와 시대정신 포럼’은 한국체육언론인회와 한국체육기자연맹이 공동 주최한다고 한다. 우리 인천에서는 선생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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