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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림 칼럼니스트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기까지 사람들은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갔으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성서에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급박한 전쟁위기가 닥쳤는데도 정부와 국민들이 이를 일상으로 여긴다. 이런 현상이 외신 보도처럼 과연 ‘심드렁한 침착성’일까? 아니면 체념인가, 자포자기인가? 이러한 엄중한 국가안보위기 시에 한가하게 군의 기둥인 육군대장을 마녀재판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과연 시의적절한 행위인가? 또한 국정원의 대공 사찰 기능을 없애려고 하는가 하면, 대통령은 유일한 대북심리전인 풍선 보내기를 막으려고 대책을 세우라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최근 사드를 임시 배치하라는 국군통수권자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불법적인 군용차량 검문검색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의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러한 환상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됐을까? 아마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인식 깊숙이 내재돼 익숙하게 학습되고 세뇌된 노예근성이 그 핵심 유전자일 것이다. 노예란 다른 사람의 소유권 아래 놓아져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뜻하며, 노예근성이란 무슨 일이든지 개인의 존엄성이나 주체성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남의 눈치만 살피는 성향을 일컫는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거나 행동하기를 두려워해 스스로를 노예로 격하시키는 용기 없는 정신도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노예의 삶에 익숙해지면 노예라는 자각도 없어지고 이를 오히려 자랑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이와 같은 노예근성은 가짜 뉴스나 타인의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타성에서, 그리고 변화에 대한 거부감과 맹목적 반대에서 나타난다. 이 근성은 자유인으로서 권리와 의무가 요구되는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감당해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가치보다 독재자와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경우에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무임승차를 당연시하고, 감사할 줄을 모르며, 일상화돼 버린 거짓, 비도덕적 뻔뻔함과 비굴함을 보이는 성향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뀌면 자신의 소신과 양심을 쉽게 저버리는 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기에는 ‘무릇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욕을 하지만, 백 배가 되면 무서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 일을 해 줄 뿐 아니라, 만 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라고 인간의 연약한 노예본성을 보여 줬다.

 이와 같은 노예근성으로부터 이 나라 지식인들은 자유로울까? 지난 대통령 탄핵 사태와 관련해 그렇게 많은 법학전문대학원의 헌법전공 교수들은 왜 침묵만 했을까? 왜 어느 재판관은 자신의 과거 5·18 판결 당사자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 농민운동가의 죽음에 검사 결과를 번복하는 대학병원과 진압을 사과하는 경찰의 양심, 사드 파동에도 항의하지 않는 결기 없는 장관, 탈원전 에너지정책에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주무부처와 전문가집단 등이 곧 이 나라 지식인의 실체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는 말로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질책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릴 무서운 말이다. 그는 1962년 10월 22일 쿠바 위기의 순간에 대국민 방송을 통해 진정한 국가지도자로서 명연설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아무도 정확하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지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선택한 길은 모든 길이 그러하듯 많은 위험으로 차 있습니다. 자유의 대가는 항상 값비싼 것이지만 미국은 항상 이를 지불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선택하지 않아야 할 길은 항복과 굴종의 길입니다"라고 단호하게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위기인 전쟁 위험에 처해 있다. 케네디는 의연하게 쿠바 위기를 넘기고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의 길로 가지 않도록, 자유통일선언을 국민들에게 할 수 있는 결기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원한다. 2018년 건국 70년의 희년엔 북한 동포들이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언변과 논문으로 해결할 수 없고 철과 혈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비스마르크를 기억하고,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아!’로 시작한다는 섬뜩한 중국 국가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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