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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모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 ‘이제라도 알 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감정보다는 덧없이 지나 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이 압도할 때 깊은 한숨을 동반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오늘은 사랑의 타이밍이 어긋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지고지순한 여인의 너무 늦은 사랑 고백과 그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한 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1900년께 오스트리아 빈. 한때 유명세를 떨치던 피아니스트 스테판 브랜드는 더 이상 예술가로 살지 않는다. 술과 여자 등 방탕한 생활로 난감한 상황에 빠진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늘 밤 도시를 뜰 계획이다.

 그런 그에게 발신인 불명의 두툼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당신이 이 편지를 볼 때쯤 난 죽어있을 거예요’라는 범상치 않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그를 사랑했던 한 여인의 지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테판의 기억 속엔 얼굴도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 이 미지의 여인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짧지만 강렬했던 두 사람의 연애사, 홀연히 사라진 스테판과 그 자리에 들어선 새 생명, 홀로 아들을 키워 낸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적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창궐했던 전염병으로 아들을 먼저 보낸 그녀는 자신의 기력이 모두 쇠하기 전 오직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편지 속에 꼭꼭 눌러 담았다.

 1948년 작인 영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비극적이며 서정적인 멜로드라마의 대가로 평가받는 막스 오퓔스 감독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첫사랑에 인생을 건 여인과 사랑을 가볍게 취급했던 한 남성 간의 어쩌면 시작되지 말았어야 할 비운의 러브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꽤 오래전 영화인 만큼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파극에 가까운 이야기와 오직 한 남성의 사랑만을 애처롭게 갈구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수동적이며 종속적인 여성상을 보여 준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순애보적 사랑이 변화시킨 남성의 최종적인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책임 없는 사랑과 쾌락만을 쫓으며 힘들거나 곤란한 현실은 회피라는 손쉬운 방법을 통해 도피하려 했던 주인공은 편지를 통해 재구성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로써 그는 쓰디쓴 삶이라도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세기 말에서 세기 초로 이어지는 불안한 시대, 뒤늦게 확인된 사랑을 그린 영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삶과 사랑, 뒤틀리고 어긋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감독 특유의 섬세한 카메라 워킹으로 우아하게 녹여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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