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가 지난해 10월 18일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앞에서 합동 추모제를 열고 있다. <기호일보 DB>
▲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가 지난해 10월 18일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앞에서 합동 추모제를 열고 있다. <기호일보 DB>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학도병만 있지 국내에서 전쟁터로 나간 학생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재일학도의용군은 국가유공자로 편입됐어도 학도의용대 6·25참전회는 아직 공식 단체 승인도 나지 않았으니까. 우리 학도병들의 명예는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 말이다."

김현생(85)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 회장은 ‘재일학도의용군 6·25참전 67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26일 국내 학도의용군이 재일학도의용군과 차별받는 것에 대한 아쉬운 점을 털어놨다.

재일학도의용군은 조국이 가장 위태로울 때 다시 우리나라를 찾은 이들이다. 이들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자원병을 모집하고 그해 9월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재일학도의용군 642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해외 국민이 참전한 사례다. 정부는 휴전 이후에도 일본 입국을 거부당해 돌아가지 못한 이들을 1968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보훈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당시 국내에서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펜을 버리고 총을 집어 든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연합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 축현초등학교에 모인 3천여 명의 학생들이다. 15살 남짓이었던 이 학생들은 해병대에 차출되거나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김 회장도 당시 인천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다 학도의용군으로 총을 들었다.

하지만 재일학도의용군과 달리 국내 학도병들은 아직까지 그 희생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훈련 당시 받은 ‘군번’이 그 이유다. 현재 정부는 국내 학도병을 ‘국가유공자’가 아닌 단순히 ‘6·25 참전자’로만 인정하고 있다. 이들이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군번을 받고 정식 군인으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당시 학도병들은 ‘영장 없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전쟁이 끝나면 모두 학교로 복귀시킨다’는 각서를 받고 활동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학생 신분을 증명해 줄 유일한 근거였던 이 각서는 현재 원본이 없어진 상태다. 학도병들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휴전 이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4년여간 교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신현수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 사무처장은 "당시 14~16살이었던 우리 학생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참전한 것으로, 영장을 받아 반(半)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과는 당연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서 생존이 확인된 학도병은 1천여 명이다. 이 중 인천 학도병이 300여 명으로 가장 많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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