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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제녕학교 뒤에 설립된 민간학교는 인명의숙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저 일진회(一進會)와 투쟁한 자강회 인천지회장이며, 박영효를 암살하려다가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란 시를 남기고 자결한 정재홍 씨이다."

 이 글은 고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 중 ‘인명의숙(仁明義塾) 설립자 지사 정재홍 씨’ 편의 서두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제녕학교(濟寧學校)는 1903년 서상빈(徐相彬)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인천의 사립학교다. 이 학교에 이어 인명의숙이 설립되는데 설립자가 대한자강회인천지회장 정재홍(鄭在洪 ?∼1907)이라는 이야기이다. 박영효(朴泳孝)는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로 이 당시에는 금릉위 벼슬에 있었는데, 후일 일제에 영합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람이다. 정재홍이 그 박영효를 암살하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재홍의 자결이 과연 박영효와 연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지연(張志淵) 등이 쓴 대한자강회 월보의 기사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공립신보(共立新報) 모두가 그런 내용을 전혀 내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려수필(騎驢隨筆)」 같은 문헌에는 정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박영효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와 적수가 되지 않으므로 자살하였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같은 소문이 돌기는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국신문 1907년 7월 2일자 기사는 정재홍의 자결은 오직 순수한 애국 열정이 동기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사는 고일 선생이 직접 인용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의심과 그릇 전하는 말들이 있으나, 그의 평소 행적과 유서를 볼 것 같으면 결코 다른 뜻이 없고 오직 나라를 위하는 뜨거운 피가 끓는 것을 참지 못하여 밖으로는 부귀공명의 욕심을, 안으로는 부모처자의 즐거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천금 같은 목숨을 버렸던 것이다."

 당시 정재홍의 죽음에 대한 다른 설(說)을 경계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정재홍이 자결을 기도하여 적십자병원에 옮겨졌을 때, 박영효가 구원비(救援費) 50환과 함께 사람을 보내 위문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정재홍은 위문 온 사람에게 ‘자신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시국의 절박함을 항상 개탄은 해 왔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인간으로서 한 번 죽는 목숨, 그 죽음을 통해 동포에게 사례가 되고자 한다. 반면 박영효 씨는 재덕(才德)이 고명하여 30년 전에 개혁을 수창(首唱)하던 사람으로 오늘날 전국이 산두(山斗)와 같이 믿고 바라는 바, 몸을 굽히고 수고를 다할 것을 마음에 새겨 죽을 때까지 힘써 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취지의 부탁까지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공립신보의 기사 내용 요약인데, 어쨌거나 암살당할 뻔한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에게 돈을 보내 위문을 한다거나, 또 암살 실패로 자결하려던 사람이 그 대상에게 이런 간곡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 박영효를 암살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증명일 것이다. 그의 죽음의 동기는 오로지 사상팔변가와 생욕사영가 내용 그대로였을 것이다.

 사상팔변가는 정재홍이 ‘나라와 상관된 미운 놈을 저격하기 위해 육혈포를 구하는 과정과 사후 자결을 통해 전국에 본보기가 되고자 결심’하는 내용이다. 물론 그 ‘미운 놈’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생욕사영가는 ‘지사의 죽음은 유력(有力)하고 영화로운 것이어서 열(十)만 잘 죽으면 잃은 국권을 되찾을 수 있으니, 자신의 죽음을 보고 따라오게’ 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공립신보는 정재홍의 모친이 "이 자식이 살아서 나라를 위해 성공치 못하였으니 그 시신에 체벌하는 것이 가하다"는 말을 했다며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인천의 우국지사 정재홍. 정 지사의 둘째 아들 정암(鄭巖), 본명 종원(鍾元)은 우리나라와 인천 연극계에서 활약한 유명한 배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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