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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석 인천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여름 외교·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창의적 외교를 주문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문 대통령이 주문한 창의적 외교란 미국과 중국 2강국에 의존하던 기존 외교의 관성을 탈피한 새로운 발상의 외교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외교라인에서 러시아나 독일, 인도 등과의 외교 협력이나 다자간 대화를 부쩍 자주 언급하는 모양새다.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더 넓게 국가안보와 한반도평화를 위해서 제3의 길 외교든 다자간 대화든 창의적 발상의 외교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권장할 일이다. 모든 일엔 창의력이 기초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의 길 외교나 다자간 해결 방식의 외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전제란 바로 굳건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조선 말기 그리고 대한제국시대 외교가 주는 뼈아픈 교훈 때문이다.

 조선은 1880년대 초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도전을 맞아 대응전략의 일환으로 서양과 수교해 그들의 조정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과 미국, 영국, 독일 등 강국으로 평가된 국가와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에 "제3국의 부당한 행동에 원만한 타결을 하도록 주선 (혹은 조정)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그런 외교적 노력의 실천이었다. 조선은 또한 한반도에서 청국과 일본의 갈등 속에서 친러정책이란 제3의 길을 추진하기도 했다. 1880년대 시도된 친러정책은 청국과 친청파 인사의 반대로, 1890년대 추진된 친러정책은 일본의 차단으로 좌절됐지만 ‘조선판’ 창의적 발상의 외교였다. 또한 조선(대한제국)은 미국과 유럽에 사절을 파견해 자주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한편 대외관계를 증진하고자 했다. 영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01년 에드워드7세 대관식에 사절을 파견하려 했던 것 역시 독립의 과시목적 때문이었다.

 조선의 지난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국적 결과는 국권의 상실이었다. 왜 그랬는가? 첫째, 냉혹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실질적인 국력 배양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개화 지식인이 중심이 된 신진인사들이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고 독립협회운동을 전개하며 대한제국을 선포(1897)까지 하게 했으나, 근대화와 독립 분위기 조성에는 일조했으나 독립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했다. 둘째, 열강들이 야심을 숨기고 표면상 발표하는 ‘대한제국의 독립’ 보장이란 선언을 고지식하게 믿어 위태로운 국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보장이란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국가수호 의지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직전 이용익은 맥켄지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은 미국 등 유럽 열강이 보장하므로 대한제국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없다"고 했다. 맥켄지는 "대한제국이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데 어느 나라가 그런 나라를 위해 싸우려 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셋째, 국력이 취약했으므로 국왕 고종은 열강을 끌어들여 세력 균형을 기도했으나, 고종의 외교적 기도는 장기적 안목과 세련된 외교술에 입각해 추진하지 못했으므로, 열강의 갈등만 조장했을 뿐 조선은 국제적 보장에 의한 독립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사활이 걸린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일본이나 중요한 정치·군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청국과 러시아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서 큰 이권을 제공하고서라도 미국·영국 같은 역외국가와 동맹 수준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으나, 역외국가와의 관계는 ‘상업적’ 관계의 수준에 머물렀다.

 고종의 조선 시대 ‘상업적’ 관계에 불과했던 한미 관계가 현재 굳건한 동맹 관계로 바뀐 것은 과거와 다른 현재 한국 안보의 자산이며 토대이다. 고종시대 외교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확실한 지지를 담보하지 않는 안보는 안보가 될 수 없으므로, 우리 안보외교는 기본축인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 수행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다른 어느 지역 보다 더 ‘뜨거운’ 지역이고,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로 이 시대는 가장 ‘뜨거운’ 시대가 되어, 더 많은 지혜의 발휘를 요구하고 있다. 고종시대 외교는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날 한국외교의 훌륭한 반면교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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